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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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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연합교회란"

캐나다 연합교회 문장 (Crest)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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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원형의 모양은 물고기의 모양을 나타내며, 이것은 초대교회인들의 크리스천 상징 기호로 사용되었었다.

속에 있는 ‘X”는 그리스도라는 희랍어 글자의 처 머리글자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된다.

왼쪽 그림 “불타는 나무” (Burning Bush)는 캐나다 장로교회의 상징이었다.

제일 위쪽의 “비둘기”는 캐나다 감리교회의 상징이었다.

왼쪽의 “열린 성경”은 캐나다 회중교회의 상징이었다.

제일 아래쪽의 글자는 알파(A)와 오메가(Ω)로써 희랍어 알파벳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이다. 이는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영원한, 살아계심”의 속성이다. (요한계시록 1:8)

라틴어 “ UT OMNES UNUM SINT”는 “저희들이 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that they may all be one”) 라는 뜻이며 이는 요한복음 17:21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기도의 말씀 중 일부이다.

캐나다 연합교회는 이렇게 탄생했다

 

 

1. 1925년 이전의 캐나다 교계

캐나다 연합교회 (The united Church of Canada)는 1925년에 장로교 (The Presbyterian Church)와 감리교 (The Methodist Church)와 회중교회 (The Congregational Church) 등 세 교파가 합동함으로 탄생한 교회다.

 

캐나다는 본래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주 후 1500년 중반부터 불란서인, 영국인 등이 캐나다 땅에 출입하기 시작하여 점진적을 이 땅을 점령하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인 활동과 함께 기독교 선교활동도 시작이 됐다. 그 초기에는 캐톨릭교회가 불란서인들의 점령지역에 들어오게 되고, 뒤를 이어 불란서 개신교, 영국의 성공회, 감리교, 회중교회, 스캇트랜드나 아일랜드의 장로교 등이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1700년 후반에는 여기저기에 교회당들이 건설되고 또 교파들도 형성이 돼갔다. 불란서나 영국의 식민지 체제는 주로 동부 캐나다를 중심으로 형성이 돼가고, 캐나다의 중서부는 모험과 점령의 방법으로 개척해 갈 땅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한마디로 캐나다는 유럽에 기존한 모든 교파들의 관심을 끄는 새로운 선교의 대상지가 되었다. 세계선교의 정렬이 뜨거웠던 당시의 일인지라 유럽의 기독교 단체들이 앞을 다투어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다른 많은 피선교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캐나다도 다양한 종파들의 전시장처럼 돼가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1800년 중반 이후 지성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간에 새 땅에 왔으니 새 교회를 시작해야 한다는 자각운동 같은 것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부 캐나다 선교라는 큰 과제를 앞에 놓고 너무도 산발적이 돼있는 교회들의 형편이 개탄되고 어떤 모양으로던지 서로 협조하지 않고는 선교의 중책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 이리하여 우선 각 교파 내에서의 화해와 협력운동이 시작되어 같은 교파 내에서의 분열과 불신을 극복해 가기 시작했다. 당시의 장로교나 감리교내에서의 분열은 유럽에서 하던 그대로를 이쪽에 옮겨놓은 현상이었다. 교회 지도자들, 특히 신학교 교수들 중의 몇 분들이 이와 같은 낡은 싸움은 이 새 땅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광범위하게 함으로써 새 땅을 위한 새 교회 운동이 성장해 가게 된 것이다. 감리교는 1874년에, 장로교는 1875년에 각각 통합된 교파를 형성하게 됐다. 또 회중교회도 1906년에 전국적인 단일교파로 통합됐다.

 

1800년 말까지의 캐나다 교회는 선교라는 이름 밑에서 진행된 부끄러운 난맥상이라고 해야 하겠다. 같은 교파 안에서도 서로 이단으로 규정하던지 멸시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교파간의 경쟁의식 같은 것은 너무도 비복음적이었다. 어린아이들에게 다른 교파의 선교지역에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거짓말을 해둬서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그 동리를 탐험할 때 마치 마귀촌으로 간 것 같은 행동을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 형편이 가히 짐작이 된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에 그의 교회가 혼란에 빠지면 해산의 고통을 겪으시면서 무너진 질서를 회복시켜주신다. 또 우리의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기에 인간들이 찢어놓은 교회를 성령의 힘으로 하나로 묶어 주시기도 하신다. 1900년 초기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운동이 힘차게 캐나다 교계에 나타난 시기라고 말 할만 하다. 질서와 연합을 찾는 믿음은 캐나다 교계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다른 지역이나 선교조직에서도 싹텄다. 세계선교에 나가있는 선교사들 간에도 경쟁보다는 상호협조가 요청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이와 같이 기독교 선교의 전환점 같은 분위기 속에서 초교파적인 연합을 선창하기 시작한 것은 캐나다 감리교회였다.

 

1902년에 위니펙에서 모였던 감리교 총회가 역사적인 결의를 하였다. 이 총회에는 관례에 따라 캐나다 장로교회에서 세 사람의 대표가 귀빈으로 파견되었고 그 중의 한 사람인 마니토바장로교 신학교 학장인 윌리람 패트릭 (William Patrick)목사가 그의 축사 가운데서 장로교와 감리교와 회중교회가 합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공식발언을 하였다. 이것이 세 교파의 연합을 시사한 첫 공식발언이 되었다. 패트릭 학장의 제언은 감리교 총회에서 열광적으로 찬성을 얻어 감리교가 연합을 찬성한다는 결의를 하고 장로교와 회중교회에 세 교파의 연합을 제의하는 공식행동을 취하게 됐다.

 

장로교회는 1904년 모인 총회에서 세 교파연합의 원칙을 찬동하는 가결을 했다. 그러나 자체 내에서 분열이 없는 전적인 합의를 전제 조건으로 내세웠다.

 

1908년 말에 세 교파의 연합위원회는 “연합원칙” (A Basis of Union)을 작성했다. 이 원칙은 1910년 장로교회와 회중교회 총회에서 통과되었다. 감리교회는 1912년 총회에서 통과시켰다. 장로교회는 그 헌법에 의하여 이 총회가 가결한 합동원칙을 각 노회에 보내어 토의 가결케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기대보다 훨씬 낮은 50개의 노회의 찬성과 20개 노회의 반대로 나타났다. 1911년에 연합원칙을 다시 전국 지교회에 보내어 토의 가결케 했다. 그 결과도 예상보다 낮은 찬성을 얻었다. 즉 69퍼센트가 찬성하고 31퍼센트가 반대한 것이다. 이리하여 장로교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1913년에는 장로교 내에 장로교의 신도를 고수하고 장로교를 존속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그룹이 탄생하게까지 됐다. 이리하여 합동문제는 교회 지도자간에, 개체교회 안에서, 심지어는 가정 안에서까지 논쟁의 초점이 되고 감정적인 충돌을 거듭하게 됐다. 감리교와 회중교회는 자중하는 태도로 장로교의 귀추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로교는 이제 민주주의 원칙으로 다수 가결을 강행할 것이냐 절대다수의 찬동을 얻을 때까지 기다릴 것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1915년 위니펙에 모였던 총회는 전국 지교회의 투표 결과를 보고받았는데 143,476표의 찬성과 89,917표의 반대라는 결과였다. 총회는 합동을 행동화하는 것을 당분간 보류하기로 하면서도 합동을 위한 준비위원회는 조직해놨다. 장로교내의 분열은 양국 약 삼분의 일이 반대한다는 결론이 되었다. 절대다수의 교인을 가지고 있는 온타리오주의 경우는 거의 반반으로 쪼개졌다. 이와 같은 와중에서 지교회를 담임한 목사들은 각종 난처한 입장에 봉착하게 됐다. 어떤 목사들은 지교회의 분열을 막아보려고 중립을 지켜보려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교인들과 소격해지고 동료목사들 사이에서도 친교가 끊어지는 아픈 경험을 하게 됐다. 1925년 6월 10일 연합교회가 탄생한 직후의 사정으로 보면1,685명의 목사 중 558명이 장로교를 존속하는 쪽으로 갔다. 다수의 목사를 확보한 연합교회는 270명의 목사가 맡을 교회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목사들과 교인들과의 관계의 또 하나의 현상은 연합교회에 들어온 대부분의 교회가 목사와 교인이 함께 들어왔으나 일부 교회는 소수의 교인들이 이탈하여 더러는 장로교에 들어가고 일부는 아예 딴 교파로 가기도 했다. 일부 교회는 목사는 연합교회로 교회는 장로교회로 갈라졌고 극소수의 교회가 목사는 장로교회로 교회는 연합교회로 들어왔다.

 

분열이전의 마지막 캐나다 장로교회의 총회는 1925년 6월 3일 토론토에서 모였다. 당시 Bloor St. Presbyterian Church의 담임목사였던 죠지 피젼 (George C. Pidgeon)목사가 총회장으로 당선됐다. 총회가 다수 가결로 연합교회 창립을 결의하자 79명의 총대들이 스캍목사 (Ephraim Scott)의 지휘하에 퇴장하여 밤 11시 45분에 낙스장로교회 (Knox Presbyterian Church)에서 장로교를 존속하는 총회를 속회하게 되었다.

 

 

2. 캐나다 연합교회 (The United Church of Canada)의 탄생

1925년 6월 10일 합동을 찬성하는 장로교 대표들과 감리교 대표들과 회중교회 대표들은 시내 Mutual Street Arena에 회동했다. 그날 모인 인원은 7천명을 초과했다. 세 교파가 합동하여 새 교회를 창립하는 예배가 엄숙히 거행됐다. 합동을 반대하고 장로교를 계속하기로 한 총회는 소수자 의식을 자각하면서 교회 재산의 분활을 교섭할 위원회를 조직하고 스캍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캐나다 연합교회의 초대 총회장은 감리교 목사 S. D. Chown 목사가 으례히 되리라고 예측했다. 그는 감리교의 유력한 목사일 뿐 아니라 교파합동을 열렬히 추진한 사람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Chown 목사가 좋은 뜻으로 사퇴함으로 장로교 피젼목사가 초대 총회장으로 피선됐다.

 

연합교회는 온타리오의 북부와 서부 캐나다에서 벌써부터 교파 합동을 지향하면서 잠정적인 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지교회들을 영접하게 되어 짧은 시일 안에 대 교파로 성장해 갔다. 장로교회도 약세가 되기는 했으나 진지하게 교회를 발전시켜 역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연합교회와 장로교회는 재산 분활 등의 문제로 어느 기간 동안 서로 아픔을 나누었다. 또 연합교회에 들어오지 않은 장로교가 캐나다 장로교회 (Tee Presbyterian Church of Canada)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두 교파 사이의 긴장은 10년간이나 계속됐다. 그러나 1937년에 드디어 연합교회는 장로교회가 “캐나다 장로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인정한다는 결의를 하게 됐다.

 

캐나다 연합교회는 그 출발에서부터 당시의 합동을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다른 교파들과 연합하는 문을 열어놓았다. 그래서 그들은 연합된 교회 (United Church)일뿐 아니라 연합하는 교회 (Uniting Church)라고 입장을 천명하였다. 1968년에는 복음주의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The Evangelical United Brethren이라는 교파가 연합교회에 들어옴으로써 지금은 네 개의 교파가 합동한 교파가 됐다. 1970년대에는 캐나다 성공회와 합동하려는 움직임이 생겨 몇 년간 상당한 진전을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성공회 주교회의가 합의를 얻지 못해 좌절되고 말았다.

 

캐나다 연합교회는 여러 교파가 합동한 까닭에 그 신학이나 행정도 다양성을 가질 수 밖에 없게 됐다. 처음 세 교파가 합동할 때 합의한 The Basis of Union이라는 원칙은 캐나다 연합교회의 신학적인 입장과 행정과 조직의 원리를 명시하는 문서인데 현재도 이 원칙을 계승하고 있는 셈이다. 쉽게 말하자면 세 교파의 장점들을 잘 포괄한 것이 캐나다 연합교회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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