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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설령 내가 에이즈에 걸려도…"

홍우영2012.12.16 19:54조회 수 7019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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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아이들에게 엄마였구나… 설령 에이즈에 감염돼도 받아들일 것"
"커피와 밥값만 줄여도 여기 아이 한 명 살릴 수 있다… 6·25 이후 우리도 이랬을 것"
"내가 어쭙잖게 돕는다고 하면서 손 벌리는 아이로 만드는 걸까… 아이들 삶을 망칠 수도 있구나"

호텔은 냉방이 안 됐다. 창문을 여니 더운 열기가 들어왔다. 말라리아모기 위험 지역이라 침대에는 모기장이 쳐 있었다. 나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고, 정하희(59)씨는 플라스틱 간이의자에 앉았다.

"제가 한국에서는 잘 살았잖아요. 부자나 유명인사는 아니었어도,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고 직장에서도 좋은 대접을 받았으니까요. 어느 날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혜택을 못 받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혜택만 받고 살았구나.' 정년(停年)이 되기 전에 직장을 그만뒀어요. 여기서 일할 건강을 남겨둬야 했으니까요."

그녀는 아프리카 우간다의 오지에서 에이즈(후천성 면역결핍증)에 감염된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여기에 오기 전 YWCA에서 31년을 일했다. 안양지역 YWCA 사무총장까지 지냈다. 그녀는 직장을 떠나 노동의 대가가 돈으로 계산되지 않는 자원봉사를 택한 것이다. 5년이 됐다.

"이 마을에는 한때 내전이 있었어요. 반군(叛軍) 캠프에서 에이즈가 발생했어요. 일부다처제 사회라 급속히 확산된 겁니다. 출산율도 6.8명으로 높아요. 처음 왔을 때 이 불쌍한 아이들을 오직 살려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이 없었어요."

적도(赤道)의 강한 햇볕이 그녀의 몸에서 모든 물기를 앗아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아이들 얘기를 할 때면 쉽게 울먹였다.

"이 아이들도 꿈이 있어요. 선생님이 되고, 간호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싶어해요.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수직 감염에 의해 에이즈 보균자로 태어난 거죠. 선진국에는 에이즈 사망률이 거의 제로가 됐어요. 좋은 영양에 약을 먹으면 면역이 떨어지지 않죠. 영양 부족의 이곳 아이들은 면역이 낮아 모기에 물려도 피부병이 생겨요. 에이즈 아이들은 유독 머리 부스럼이 많아요."

―정 선생은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들을 돌볼 수 있죠?

"아이들은 에이즈로 죽는 게 아니라 면역이 약해 다른 병으로 죽어요. 감기 증세를 보였다가 죽기도 하죠. 에이즈에 감염되면 영양이 먼저 공급돼야 해요. 처음 제가 와서는 매달 포쇼(옥수수 가루)와 콩, 설탕, 달걀 다섯 개만 줄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분유도 주고 면역 증강에 도움되는 영양제를 주고 있어요."

―그건 치료가 아니지 않습니까?

"치료약은 국제사회로부터 지원받고 있어요. 물론 중간 단계에서 치료약이 가끔 사라져요. 그럴 때면 제가 그 약을 구해와야 해요. "

―이곳에서는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편견이 없나요?

"여기서 처음 만난 아이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고 물었어요. 무엇이든 다 필요한 아이이기 때문에 '무엇, 무엇, 무엇…'물질적인 것을 댈 줄 알았어요.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리다가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아이는 아버지가 에이즈로 사망한 뒤, 엄마와 함께 마을에서 쫓겨났어요. 학교에서는 다른 아이들이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무슨 변호사가 되겠다는 거냐'고 놀렸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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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하희씨는“일생을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만 사는 것은 내 가치관에 맞지 않았다”고 말했다. /소로티(우간다)=최보식 기자

―정 선생은 에이즈 감염자들과 접촉하는 데 전혀 꺼림칙함이 없나요?

"일상 접촉으로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왔어요. 여기 와서 처음 석 달 동안 많이 아팠어요. 그때는 내가 에이즈에 걸렸나, 검사를 해본 적도 있어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서 피검사를 할 때 두세 번 제게 피가 튄 적이 있었어요. 이제는 감염돼도 할 수 없다고 받아들여요."

―그걸 왜 받아들이는 거죠?

"최선을 다했는데 감염되면 어쩔 수 없죠. 그때는 저도 약을 먹고 살아야죠."

―이 오지의 마을에는 알고서 온 건가요?

"한국기아대책기구에서 여기로 파견했어요. 내가 결혼하지 않았으니까 쉽게 결정할 수 있었는지 몰라요. 그때까지 우간다라면 '이디 아민'이라는 악명 높은 독재자만 알았지(현 무세베니 대통령도 26년째 집권), 그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죠. 여기 오는 길은 지금보다 훨씬 더 험했어요."

그녀를 만나는 데만 사흘의 여정(旅程)이 걸렸다. 직항편으로 나이로비 공항(케냐)까지 14시간 반을 날아갔고, 한나절 기다려 비행기를 갈아타고 1시간15분을 비행했다.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은 '엔테베 기습작전'(1976년 이스라엘 특공대가 여객기 납치범과 우간다 군인을 급습해 모두 사살)으로 유명한 곳이다. 현재의 공항은 그 역사적 공항이 아니고 새로 지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수화물을 찾는 동안 두 번이나 정전이 됐다.

다음 날 현지인 운전사와 둘이서 동북쪽으로 차를 달렸다. 도중에 차를 세우니 나뭇가지에 끼운 닭다리와 구운 바나나를 든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걸로 점심을 때웠다. 주위 풍광은 완만한 구릉과 차밭, 사탕수수 농장, 초록의 습지가 이어졌다. 하지만 차가 달리는 왕복 2차선의 노면에는 웅덩이가 곳곳에 패여 있었다. 차는 웅덩이의 덫에 걸려 튀어오르곤 했다. 가는 길에 전복된 컨테이너 차량 두 대를 봤다. 그 누런 흙먼지를 덮어쓴 채 그녀의 마을 '소로티'까지는 7시간이 걸렸다.

"작년에 저도 달걀 2400개를 옮기다가 차가 굴렀어요. 어깨와 손가락뼈가 부러지고, 척추를 다쳤어요. 사고 당일 아이들 캠프가 있었어요. 제 소식을 듣고 아이들이 엉엉 울었다는 거예요. (또 울면서) 이 아이들에게 내가 엄마구나…. 일찍 한국에 가서 치료받았으면 나았을 텐데, 생명에 지장 있는 사고라고 생각지 않았어요. 사실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해요."

그녀의 걸음걸이는 온전하지 않았다. 달리 치료 방법이 없는 그녀는 도시에 있는 한국인 선교사를 찾아가 침(鍼)을 맞았다고 했다.

―일상에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요?

"처음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는 사흘 만에 체중이 6㎏쯤 빠졌어요. 설사를 하고 무기력하게 누워 있었지요. 그 뒤에도 말라리아와 장티푸스에 몇번 더 걸렸어요. 이제는 증상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에요. 좀 불편하지만 별로 어려움은 없어요."

―이 낯선 땅에 처음 왔을 때 어떻게 시작한 거죠?

"미션을 받고 왔는데 처음에는 막막했어요. 마을 지도자와 교사들을 만나고, 현지인 직원과 함께 '에이즈 아이들을 알고 있다면 내게 보내달라'며 집집마다 찾아다녔어요. 시작할 때 아이들 숫자가 98명이었어요. 지금은 500명쯤 됩니다. 전체 에이즈 숫자에 비하면 이는 흔적도 없는 거죠. 하지만 제가 꼭 필요한 아이들이죠."

―정 선생이 없다면 진짜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봅니까?

"여기는 정상적인 사람도 먹고살기가 어려워요. 이 아이들은 아예 버려져 있었죠. 도움의 손길이 없다면 아이들은 빠르게 죽어갈 거예요. "

―포쇼, 콩, 설탕을 주는 것으로? 이는 받아먹는 것에 아이들을 길들여지게 만들지 않을까요?

"여기 와 일 년이 지나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쭙잖게 돕는다고 하면서 손 벌리는 아이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이건 아이들의 삶을 오히려 망칠 수도 있구나' 하는 걱정을 저도 했어요."

―실제 아이들은 그런 물품을 받기 위해 모여드는 것이겠지요?

"음식, 약, 학용품, 신발, 교복, 모포 등을 나눠주면서 '이건 공짜다. 하지만 영원히 공짜는 아니다'고 말합니다. 틈날 때마다 '이건 내가 주는 게 아니다. 한국에 있는 후원자들이 준 것이다. 나중에 너희가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업을 가졌을 때는 되갚아야 한다. 우리에게 되갚으라는 말이 아니다. 너희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받은 것을 되돌려줘야 한다. 그렇게 하겠다면 손을 들어라'고 반복해요. 아이들에게 자존감과 리더십을 키워주려는 겁니다."

―이런 식의 구호 활동으로 과연 변화가 일어날까요?

"여기서 3년쯤 생활하면서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지, 지금의 방식은 지혜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년에 1에이커(약 1220평) 규모의 자활농장을 시작했어요. 반군에 끌려갔다 온 아이 20명에게 땅콩과 녹두를 심게 했어요. 이게 길이구나. 앞으로 땅을 분양해주고 씨앗과 농기구는 공동 관리하는 농장을 계속 확장할 겁니다. 또 염소를 한 마리씩 나눠주는 프로젝트도 합니다. 아이 150명이 받았어요. 제일 먼저 받은 아이의 염소는 새끼를 낳고 팔려서 이미 소가 됐어요."

사무실에 딸린 방 한 칸이 그녀의 집이었다. 가정집 살림과 무관했다. 동네 호텔에서 내가 저녁을 샀을 때, 계산서를 보고 그녀는 너무 많이 나왔다고 놀라워했다. 서울로 치면 액수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돌보는 아이들과 관련된 것을 빼고는 동전 한 푼까지 따질 정도로 각박했다.

"일 년에 한 번 한국에 가서 친구를 만나면 '후원 좀 해라, 커피와 밥값만 줄여도 여기서는 아이 한 명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해요. (또 울먹이며) 한국에서 3만원이 없으면 좀 불편하지만, 생명이 걸린 돈은 아니잖아요. 여기서는 아이들을 살리고 공부를 하고 꿈을 이룰 수 있는 돈이죠."

―기아대책기구로부터 생활비를 얼마나 지원받습니까?

"제 생활비는 교회와 가족ㆍ친구들이 도와주고 있어요.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돈은 오직 현지 아이들을 위해서만 씁니다."

―우간다의 에이즈 아이들 문제는 우리에게 너무 멉니다.

"한국 안에도 어려움이 많고, 북한은 더 어려운데, 우간다의 에이즈 아이를 도와달라면 호소력이 있겠느냐고 해요.그런데 6·25 이후 우리도 이러지 않았을까, 전쟁고아들이 살아남아 공부를 했어요.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 진 빚을 여기서 조금이나마 갚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도 있어요."

―언제까지 여기에 머물 겁니까?

"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저보다 더 잘하실 분이 나타나는 날까지요. 일생을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사는 것은 제 가치관으로는 미안했어요."

다음 날 그녀의 사무실 마당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다. 에이즈 아이들 마흔 명쯤이 모였다. 여러 지역을 돌며 파티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일찍 크리스마스가 시작된 것이다. 지루한 대선 후보들의 유세와 공방만 보다가, 땡볕 속에서 '아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구나'를 깨달았다.


조선일보 2012.12.17자에 실린 최보식 기자의 '최보식이 만난 사람들'에서


입력 : 2012.12.1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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