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님의 삶
간증ː주광조 (주기철 목사의 4남으로 영락교회 장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지 이미 백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오늘날 우리는 자유로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 기독교 역사의 줄기를 찾아 올라가 보면 피눈물과 땀에 얽히고 설킨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제 시대36년 동안의 그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우리의 선배요 선각자였던 수많은 주의 종들이 순교라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하나님을 믿고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96년 전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출생했다. 웅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00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평안북도 오산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오산학교에서 청년 주기철은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李昇薰ㆍ1864∼1930) 선생님과 고당 조만식(曺晩植ㆍ1883∼1950) 장로님으로부터 나라사랑과 민족정신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오산학교 교장이시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과 청년 주기철의 만남은 뒷날 두 사람이 평양 산정현교회에 가서 순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연을 맺게 해 주었던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된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이는 선각자요, 민족주의적인 스승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묘하게 작용을 하였다. 어렸을 때 앓았던 안질 때문에 도저히 더 책을 읽거나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청년 주기철은 청운의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낙향한 주기철에게는 전혀 다른 길이 하나님께로부터 예비되어 있었다.
(1) ▶ 30대 초반 목회자의 첫 번째 도전
고향인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만들어 젊은 청년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마침 3ㆍ1운동이 터졌다. 이 운동에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젊은 주기철은 처음 경찰서에 붙들려 가서 2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르는 가운데 자신의 인생관에 큰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출옥하자마자 마산 문창교회에 있었던, 당대의 대부흥사 김익두(金益斗ㆍ1874∼1950)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젊은 주기철은 성령의 감화를 받고 성직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눈병이 다 나은 뒤에 고향사람들에게는 다시 연희 전문 상과에 복학한다는 말을 하고는 서울을 건너뛰어 평양까지 가서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5년 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주 목사님은 부산 초량교회에서 6년, 그리고 곧이어마산 문창교회에 가서 다시 6년간 시무를 하셨다. 초량교회와 문창교회 시무 12년 동안 이미 주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밝히면서, 신앙진리의 수호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셨다.
1929년, 목사님이 경남노회 부회장 시절에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정식으로 제출하여 이것을 가결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30대 초반의 젊은 목회자였던 주 목사님의 일본 제국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진로와 이 시대 최후의 보루로서 한국교회의 사명이 곧 신사참배 반대운동임을 깨닫고 그 운동에 앞장서신 것이다.
당연히 일본 경찰은 이러한 주 목사님의 거동에 주목하고 감시하기 시작했다.1935년 5월 주 목사님이 경남노회장 시절이었다. 지금 이북에 있는 금강산 온절리에 장로교 목회자들을 위한 수양관이 있었다. 이 수양관에서 하기수련회가 개최되었는데, 전국 250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사로 초빙되었던 주 목사님은「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다.
이 설교의 요지는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침례인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간통한 헤롯왕을 그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통치자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침례인 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다 하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선지자의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왜 못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가 되어 떨고만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감시하고 있던 일본경찰에 의해서 주 목사님의 설교는 여기서 중단이 됐다. 주 목사님은 강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그 날 모였던 250여명의 목회자들은 다 강제 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 설교는 오랫동안 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79년 4월 주 목사님 35주년 추도예배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렸을 때에 작고 하신 새문안교회 당회장이었던 강신명(姜信明ㆍ1909∼1985) 목사님께서 옛날 케케묵은 기독교 잡지에서 주 목사님의「예언자의 권위」라는 이 설교를 발견해서 그 날 추도예배 때에 읽어주심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그런 설교였다.「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의 설교였지만, 지금은 ‘중단된 설교’는 별명으로서 널리 많이 알려져 있다.
(2) ▶ 순교의 첫길
당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컫는 ‘거룩한 도성’(聖都)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교회를 굴복시켜서 한국 교회를 어떻게 하든지 일본의 우상 앞에 굴복시키려는 계책을 세웠다. 평양교회를 굴복시키는 것만이 곧 상징적으로 온 조선의 교회를 굴복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에 평양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했다.
이토록 절박한 처지에 빠졌던 평양교회는 이 시련과 환난을 극복해 주고,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해 주며, 일본의 태양신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그런 영적 지도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래서 평양 산정현교회 수석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께서 옛날 오산학교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님을 생각해 내셨다. 그리고 조 장로님이 몸소 마산 문창교회까지 내려와 주 목사님을 평양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초빙하였다. 주 목사님은 존경하는 스승의 간청에 기꺼이 응해서 1936년 여름 당신이 피흘려 묻힐 평양에 입성해서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셨다.
이제 주 목사님이 평양에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십계명에 입각한 성경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일이었다. 또한 산산이 부서져버린 한국교회에 마지막 그루터기로 남아 일본의 우상과 최후까지 싸우고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며, 한국교회의 빛나는 전통을 단절없이 이어가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주 목사님이 평양에서 해야 할 사역이었다.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같이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다.”
이것이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첫 날 강단에 서서 외친 첫 설교였다. 산정현교회가 이 신사참배 항거 운동으로 일본의 첫 번째 화살을 받게 된 것은 주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지 1년 반 되었을 때였다. 그 때 산정현교회는 5층 건물로 크게 신축하였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지었다고 했다. 그렇게 큰 교회를 지어놓고 그 헌당예배를 드리기 15분 전에 경찰에 의해서 주기철 목사님이 갑자기 구속되는데서부터 그 환난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구속의 사유는 그 전전날 평안북도 선천에서 평북노회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찬성 결의하는 불상사가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 소식이 뉴스와 신문으로 보도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분기했다. 당시 평북노회장이었던 김XX 목사님이 몇 해 전에 평양신학교를 방문하여 기념식수한 소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리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 데모를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이것이 크게 번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모두 체포해 평양 남산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가하면서 그 배후 인물과 주동 인물을 캐내기 시작했다. 거기서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이름이 거명되었다. 그러자 경찰은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주 목사님을 첫 번째로 구속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산정현교회 헌당예배는 당회장 목사님이 안 계신 가운데 눈물 속에 거행되었다. 또한 이것은 앞으로 닥칠 ‘7년 동안’ 산정현 교회 고난의 시작이었고, 주 목사님에게는 순교의 첫 길이기도 했다.
주 목사님의 두 번째 구속은 첫 번째 구속에서 풀려난 다음, 1938년 9월 예수교 장로회 27차 총회가 평양에서 거행되기 두 달 전에 집행되었다. 이 때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지 기독교의 본산인 이 평양에서 신사참배 찬성결의를 하게 하고, 한국교회를 일본의 신 앞에 굴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력히 반대할 것을 추측되는 주 목사님과 몇몇 목사님을 사전에 검속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본 경찰은 각 도의 노회 총대가 평양으로 모여들었을 때 목사님이나 장로님 한 분당 양 옆에 두 사람의 형사를 동행시키면서 계속적으로 협박하였다. 한국기독교사의 기록으로는 1938년 9월 전국 27개 노회에서 목사 86명, 장로 85명, 그리고 선교사 22명, 도합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 사이사이에 일본 고등계 형사97명이 자리잡은 가운데서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낭독하면서 신사참배를 정식으로 결의하고 말았다.
“우리들 목사는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신앙문제도 아니요,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라고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해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합니다.”
이렇게 미리 짜여진 성명서를 낭독하고 전국 27개 노회장이었던 목사 27명은 장로회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 신사에 직접 가서 큰 절을 하게 되었다.
(3) ▶ 어머니의 기도
이 신사참배 문제로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이 평양 남산 경찰서에 두 번째로 구속되자 어머니 오정모 사모님은 담요 한 장을 똘똘 말아 가지고 교회로 가셨다. 강단 바로 밑에 담요를 깔아 놓고 아버님이 출옥하실 때까지 그곳에서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계속하셨다.
장로교 총회가 모여 신사참배가 찬성 결의되기 전날 밤, 어머니는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계셨다. 그런데 아마 밤 열 두 시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좀 피곤하였던지, 꾸벅꾸벅 졸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산정현교회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란다. 그러자 발자국 소리가 뚜벅뚜벅 나더니 어머니 바로 뒤에 와서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혹시 교인들이 왔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똑같이 생긴 쌍둥이 주 목사님 세 사람이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어느 분이 진짜 제 남편 주 목사님입니까?”하고 물었단다. 세 사람의 주 목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어머니 얼굴만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돌아서더니 뚜벅뚜벅 걸어서 산정현교회 문을 나서서 저 남쪽으로 달음박질하여 뛰어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주 목사님, 주 목사님 저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몸부림치고 소리치다 깨보니 꿈이었다.
어머니는 무언가 불길한 꿈 같아서 “이거 혹시 오늘 신사참배가 찬성 결의되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하며 한참 기도를 하였다. 그러다가 새벽 다섯시가 좀 지나서 또 육신이 피곤해서 잠깐 졸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리더란다. 발자국 소리도 가만가만 어머니 뒤에 오길래 “또 주 목사님이 오시는가?” 싶어 돌아보니 머리를 빡빡 깎은 학생 하나가 어머니 앞에 와 어깨를 탁탁 치는 것이었다.
“오집사, 왜 잠만 자? 일어나 ‘호세아 9장’을 읽어. ‘호세아 9장’을 읽어.”
이 두 마디를 하고 일어나 나가더라는 것이다. 어머님은 놀라서 전기 불을 켜고 ‘호세아 9장 1절에서 3절’을 찾아 읽으셨다.
『1 오 이스라엘아, 너는 다른 백성처럼 기쁨으로 즐거워하지 말라. 이는 네가 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행음하였으며 네가 모든 타작마당에서 보상을 사랑하였음이라. 2 타작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이스라엘 안에서 새 포도주도 동이 날 것이라. 3 그들은 주의 땅에 거하지 못하리니, 에프라임은 이집트로 돌이킬 것이며 그들이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들을 먹으리라. 』
어머니는 이 성결구절을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 날 오후에 열리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일본의 계략대로 가결되고,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떠나시는 것으로 그 꿈을 해석하셨다. 나는 어머니께서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하다가 그 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와, 여러 제직들과 앉아서 이 꿈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어렸을 적에 엿들은 기억이 난다.
이렇게 해서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일본의 계략대로 가결되자 그들은 곧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을 석방했다.
(4) ▶ 농우회 사건과 고문
그런데 한 달 뒤에 경상북도 의성교회에서 유재기(柳載奇/일본식 이름:天城虛心,ㆍ1905∼1949) 목사님이 일으켰던 농우회 사건이 터지면서, 주 목사님은 세 번째 구속되었다. 이번에는 평양경찰서가 아닌 경북 의성경찰서로 압송을 당했다.
이 농우회는 1930년대 평양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조선독립과 민족운동이 깔려 있었다. 신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기에 당연히 신앙운동까지 곁들여 있었다. 이들은 조만식 장로님을 농우회 회장으로 추대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전국 각지로 흩어지면서 자기가 담임 맡은 교회서 형편에 따라 이 농우회 운동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그러던 가운데 의성교회 담임목사가 됐던 유재기 목사님은 의성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그만 일본 경찰에 탐지되었다. 그래서 일대 검거 선풍이 일어나 경북 의성교회의 목회자들과 젊은 청년들이 전부다 체포되고, 갇히게 되었다. 일본경찰은 그 배후 인물에 회장이 조만식 장로님이셨기 때문에 평양과 연결이 되어 있다 싶어 온갖 고문을 다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입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이름이 거명되자, 그들은 즉시 주 목사님을 의성으로 압송한 것이다.
평양과 경북 의성경찰서는 합동으로 주 목사님께 농우회 사건이라는 올가미를 뒤집어 씌우면서 또 한편 신사참배 문제까지 결부시켜 주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갖은 고문을 다했다.
7개월 동안 주 목사님이 잡혀 계셨던 의성경찰서에서의 고통은 아마 가장 혹독한 고통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주 목사님의 일대기 영화인「저 높은 곳을 향하여」영화에서의 고문 장면이 바로 의성경찰서에서 당하신 고문을 시나리오로 재현한 것이다.
아버님은 온갖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손ㆍ발톱이 다 빠지고, 하루에도 기절하기를 여러번이었다. 배고픔과 추위와 육신의 고통에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넘겨야 했던 어려운 처지에 계셨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기독교 역사의 기록에 보면, 경북 의성경찰서에서 한 목사님은 그 지하 고문실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들것에 실려 바로 공동묘지로 직행했다.
또 한 젊은 목사님은 고문 끝에 들것에 실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일만에 그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한 전도사님은 고문 끝에 정신이상이 생겨서 정신병원에서 그 마지막을 쓸쓸하게 보내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 목사님은 뒷날 산정현교회에 돌아와서 이때의 고통을 이렇게 술회하셨다.
“7개월 동안 의성에서 받았던 육체적인 고통은 그래도 견딜 수가 있었는데, 정신적인 고독감은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 70여명의 동지가 하루 아침에 다 잡혀 왔고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동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일본에 항복하곤 했다.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두 사람의 동지가 나가버리고,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나가버리고...12월이 다 돼 가니까 그 수많은 동지가 다 나가버리고 마지막 네 명이 남아 끝까지 항거했는데, 그때 받았던 정신적인 고독감, 외로움은 정말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끝끝내 주 목사님은 이 죽음의 시련을 이겨내셨다. 혐의를 잡지 못한 경찰은 어쩔 수 없이 7개월 만에 주 목사님을 석방하게 되었다. 1939년 6월 첫 번째 주일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밤열차를 타고 주일 아침 10시 조금 지나서 평양역에 내리셨다. 나는 그때 산정현교회 교인의 손에 끌려서 평양역에 나갔다가 7개월만에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뵈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 그 무릎에 앉아서 텁수룩하게 난 아버님의 수염을 매만지면서 산정현교회로 돌아온 추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5) ▶ 유언과 같은 설교
산정현교회 지천에 있는 목사관에는 우리 할머니께서 7개월 동안 못봤던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쪽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감옥에서 입고 나온 옷 그대로 산정현교회 강단 위로 바로 올라가셨다.
7개월만에 목사님이 돌아오시자 산정현교회는 성도 1천여명, 그리고 주 목사님의 석방 소식을 듣고 그 날 모여들었던 주변 교회와 평양시민까지 합쳐서 1천여명, 도합 2천여명의 성도들이 산정현교회 2층과 3층을 꽉 메웠다. 또 평양경찰서, 대동경찰서가 주위를 포위한 채 7개월만에 돌아오신 주 목사님의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인지 모두 귀를 귀울이고 있었다.
이 날의 설교는「다섯 제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였는데, 차라리 기도에 가까웠다. ‘로마서 8장 18절, 32절, 39절’의 성경을 인용하신 다음, 이 기도가 7개월 동안 의성경찰서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의 기도제목이며, 동시에 이것은 자신에게 유언과 같은 설교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다.
『 첫 번째 나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에서부터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저는 지금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이 다 부음 앞에서 떨고 슬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이 무서워 제가 의를 버리고 이 죽음을 면하려고 저의 믿음을 버리지 않게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거늘 어찌 제가 이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제가 백년 천년 산들 그것이 무슨 삶이리요.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니 이 목숨 아끼다 우리 주님 욕되지 않게 사망의 권세에서 저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번째 나의 기도는, “장기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한두 번 받는 고난은 혹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견디기가 참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도 한두 번이라면 당할 수 있겠지마는 1년, 10년 계속되는 오래 끄는 고난이라면 견디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겠지만, 제 말 한마디 타협하거나, 저의 고개 한 번 까딱하면 이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 어느 누구도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저 같은 약졸이야 이루 말해 무엇하리요. 다만 내 주님만 의지하오니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가야 70생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주님과 더불어 영생불사의 몸이 될 것이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보고 나아가오니 이 몸을 붙들어 주사 이 환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 번째 나의 기도는, “내 어머니와 내 처자를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저에게는 70이 넘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와 아들 넷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도 지중하고, 한 남편과 아비된 책임도 무거워 더욱 괴롭습니다.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상할 때, 제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습니까? 또 제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나를 위해 바쳤거늘 나는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아버지로서의 자식을 키우고 돌보아야 하는 의무마저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할 줄 알거늘 어린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지 아니할 수 없는 이 마음 한없이 괴롭습니다. 자비하신 내 주님께 부탁하오니 인정의 젖줄이 저를 얽매이지 않게 기도합니다. 순교자로서 갖춰야 할 초인적인 용기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네 번째 나의 기도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시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백성은 나라에 대한 충절의 의가 있고, 여인이라면 남편에 대한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의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다른 신에게 저의 정절을 깨지 않게 하옵소서. 이 몸이 어려서 주 안에서 자랐고, 주 앞에서 헌신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어떤 환난이나 곤경이나 박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라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끊을 수 없으니 오직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시옵소서.
다섯 번째 나의 마지막 기도는,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옥중에서든 사형장에서든 제 목숨 끊어질 때 저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쓰러질 때 저의 영혼을 내 주님께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나의 고향이요, 아버지의 집이 곧 나의 집입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이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길을 걷게 하옵소서. 죄악에 오염된 이 세상에서 나를 온전케 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을 오직 나의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아멘. 』
이 날 이미 순교를 각오했던 주 목사님의 이 설교는 2천여명의 모든 청중에게 울음바다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온 교우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더해 주었다. 의성경찰서에서 석방된 아버지는 6개월 정도 가족과 함께 계실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께서 나와 가장 오래 함께 계셨던 때였다.
(6) ▶ 산정현교회의 폐쇄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했던 그 분은 무너져가는 한국교회와 동료 교역자의 믿음의 배신에 끊임없이 질타를 가하셨다. 그러자 주 목사님의 입을 틀어막고 강단에 다시 서지 못하게 하고자 일본 경찰은 온갖 공작을 자행했다. 산정현교회의 당회원 장로들에게 주 목사님을 해임 처분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산정현교회의 수석 장로는 앞서 밝혔듯이 조만식 장로님이셨다. 그리고 오윤선(吳潤善ㆍ1893∼1960)장로님이라고 계셨다. 이 분은 조 장로님과 호형호제하던 사이로 해방 이후 조 장로님이 평남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을 때 부위원장이 되셨던 분이었다. 또 김동원(金東元ㆍ?∼?) 장로라는 분도 계셨다. 이분은 이미 독립운동으로 2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나오신 분이었다.
이 분은 해방 이후에 월남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국회의장일 때, 부의장이셨던 분이시다. 또 유계준(劉啓俊ㆍ1879∼1950) 장로님은 6ㆍ25사변 때 순교하셨는데, 그 당시 벌써 평양을 거쳐가는 모든 독립군에게 독립군 자금을 대준다는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민족주의자였다.
이처럼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님들은 모두 당시의 애국주의자요,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였던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주기철 목사님을 중심에 놓고 신사참배 항거운동을 하면서 일본과 항거하셨던 것이다. 그런 장로님들이었기에 아무리 일본 경찰이 강압식으로 주 목사님을 파면 처분하라고 해도 들을 리 없었다.
일본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제일 약해 보이는 평양노회로 하여금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 처분하게 하기로 계책을 세웠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주 목사님을 네 번째 구속해서 평양경찰서에 잡아 가두었다. 그 해 12월 일본 경찰에 의해 소집된 평양노회는 강압에 못 이겨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파면 처분했다. 또한 당회원 일곱 장로님들을 정직 처분하고, 노회에서 임명한 장XX목사를 산정현교회의 임시 담임목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일곱 사람의 수습위원 목사를 두어 산정현교회를 접수하게 하였다.
석 달 뒤, 1940년 3월 26일 부활주일 아침이었다. 당회장 목사님이 없고 일곱 장로님이 정직 처분되어 교회에 못나오니까, 안수집사님이 나와 부활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당시의 찬송가 204장,(통일 찬송가 384장/영광을 주께 63장 <말씀보존학회 刊>)「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다같이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교회 문이 열리면서 일본 형사대가 들어와서 교회를 포위했다. 그리고 노회에서 임명한 일곱 목사님이 들어와 강단을 점령하고, 그 중의 한 목사가 나와서 사회를 보고, 한 목사가 찬송가 인도, 한 목사가 기도, 한 목사가 성경봉독, 그리고 최XX목사가 나와서 설교를 하였다.
교인 1천여명은 양재헌 안수집사님의 인도에 따라 그 예배가 끝날 때까지 1시간20분 동안「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불렀다. 일본경찰의 명령, 평양노회의 권위도 산정현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안 통했다. 일본 경찰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안 되니까 전부 다 내쫓고, 그 날 젊은 제직들 20여명을 전부 경찰서에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는 산정현교회에 큰 못을 박아 교회를 완전히 폐쇄 처분하고 말했다.
(7) ▶ 목사관에서 쫓겨나다
2주일 뒤, 목사 두 사람과 형사 열 다섯 명이 우리 집으로 갑자기 쳐들어 왔다. 그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감옥에 계시고, 집에는 나와 바로 위의 형과, 할머니, 이렇게 셋밖에 없었다. 두 목사님은 주머니에서 쪽지를 하나 끄집어내서 펴놓고 읽고서는 우리에게 주었다. 그 쪽지는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에서 파면 처분 당했으니 이제 목사도 아니니 사택에 있을 자격도 없고, 평양노회에서 이 사택을 평양 신학교 교수 사택으로 이 목사관을 이용하기로 했으니 오늘 당장 나가달라’는 이른바 “목사관 전도명령서”였다.
할머니께서 문고리를 붙잡고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주 목사가 와서 같이 나가자고 하기 전에는 내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자 형사 한 사람이 할머니를 번쩍 안아다가 대문 밖에다 내팽개쳤다. 그리고 우리를 강제로 대문 밖으로 내쫓고, 그들이 가져온 손수레 두개에 짐을 싣고 거기서 10분 거리에 있는 어느 기생집 단칸방에다 우리를 전부 쫓아내었다. 그리고 그 목사관까지도 완전히 폐쇄 처분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우리 가족의 박해와 유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해방될 때까지 열세 번 이사를 해야 했는데, 그것은 일본형사의 감시 아래 있는 사람에게 자기 집을 빌려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산정현교회 성도들도 교회를 잃어 버린 채 멀리서 교회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새벽이면 교회에 와서 교회 벽돌을 붙잡고 새벽기도를 드렸다. 이런 환난이 그 뒤 5년 동안 계속되었다.
1940년 4월 아버지께서 목사직에서 파면 처분 당하고, 목사관 아닌 우리 셋방으로 석방되어 돌아오셨다.
“당신은 산정현교회에서 파면 당하고, 이제 목사도 아니고, 그러니 당신이 설 강단도 없고, 당신이 떠들어 대봤자 별 수 없다. 당신만 신사참배를 안하면 돼. 그것이 죄라고 남에게 선동만 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더불어 고향에 가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일본 경찰이 주 목사님에게 한 회유였다. 그러나 이 진리의 파수꾼이자, 믿음의 용사는 승복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서야 할 강단이 없었지만 그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강단’이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곳에는 복음의 진리에 굶주렸던 어린양들이 몰려와서 대군중을 이루었다. 그때마다 목자이신 주 목사님은 그 수많은 양떼를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는데, 내 어찌 이것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 할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
그는 이렇게 수없이 조그만 방에서, 조그만 마당에서, 길거리에서 외쳤다. 이러한 아버지에게도 오직 한 가지 당신의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이 가슴에 걸림돌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정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철석같은 마음이 깨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서는 자 또한 많이 있습니다. 이 육신에 얽힌 정에서 나를, 나를 풀어주시옵소서.”
사실 나의 아버님의 순교의 뒤안길에는 이러한 인정의 애환이 잔잔히 깔려 있었다.
“어머니, 하나님께 어머니를 맡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가까이 불러 모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는 우리를 위해 잠시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 불의한 이 자식은 제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합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해 하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며 제자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당신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오 주님, 내 어머니를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불의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자비하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더 나을 줄로 믿고 내 어머니를 무소불능하신 당신께 부탁하옵고, 이 몸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갑니다.”
그 날 마침 20여명의 산정현교회 제직들이 찾아와 있었다. 모두 다 슬픔에 찬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경 찬송가를 양측에 끼고 나오시던 아버지는 그분들을 보시자, “우리 다 같이 찬송가 한 장을 부릅시다.” 하셨다. 당시 찬송가333장,(통일 찬송가 543장/영광을 주께 291장 <말씀보존학회 刊>)「저 높은 곳을 향하여」였다. 아버님이 아마도 그렇게 좋아하신 찬송가가 없었을 것이다. 집에서도 언제나 그 찬송가를 부르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일대기 영화를 촬영할 때 내가 영화 제목으로「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고 붙이자고 제의했었다. 찬송가를 다같이 부르고는 성경 한 구절을 찾아 읽어 주셨다. ‘아모스 8장 11∼13절’이었다.
『11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그 날들이 오리라.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의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라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니라. 12 사람들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방황할 것이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달릴 것이나 그것을 찾지 못하리라. 13 그 날에는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리라.』
이 말씀을 읽으신 다음 마지막 설교를 하셨다.
『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이 수욕을 내가 피하여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내 평안과 내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그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져야 할 이 십자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제가 피하였다가 주님이 이 다음에 “너는 내가 준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저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옷에 솜도 안 넣으면...”
“우리 조선사람들은 옛날부터 의리와 윤리가 있는데 어찌 스승이 제자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단 말이요. 이것은 정치와 도덕, 사상, 이 모든 것을 떠나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출애굽해서 카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 만나(manna)를 받아 먹었는데, 바로 너희들 앞에 있는 죽 그릇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떨어뜨려주신 만나다.”
“ 뭐야, 밖에서, 문 닫아!”
“내가 1944년 3월 31일 오후 4시에 평양형무소 면회실 밖에서 보았던3∼4초간의 아버님의 모습, 그 모습을 이「저 높은 곳을 향하여」영화에서 다시 한번 재현 시켜주면 고맙겠습니다.”
“당신은 꼭,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남편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느끼셨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께 이렇게 첫마디를 꺼내셨다. 그 어머니의 말을 받았던 아버지는 거기에 화답하듯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렇소, 내 살아서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갈 것을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 기도해주오. 내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당신한테 부탁하오. 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조선 교회를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혔다. 어머니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눈물 섞인 음성으로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씀이 없으시느냐?”고 했더니, 아버지께서는 손을 한번 흔들어 주시더란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돌아보시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이 다음에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입관할 때 내 가슴 위에다 따뜻한 숭늉 한 그릇 얹어주었으면 좋겠소. 저 나라 가서라도 내 아버지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드리면서 이 세상에서 못다한 효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에요.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이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가야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 죽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닌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쌍한 나의 할머니와 산정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주 목사님은 이렇게 순교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그 당시에는 한갓 불명예스러운 죄수로서 이 세상을 하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분은 우리 한국 교회사나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이 신앙의 전통을 단절없이 이어주는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훗날 다시 열매가 크게 맺을 것을 기대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하면서 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