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몬트리올 한인연합교회

_

자유게시판

『 순교자,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 』 소양 주기철 목사 순교 간증

minari2013.01.12 19:50조회 수 13988댓글 0

  • 1
    • 글자 크기

images (1).jpg


주기철 목사님의 삶
간증ː주광조 (주기철 목사의 4남으로 영락교회 장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지 이미 백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오늘날 우리는 자유로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우리 기독교 역사의 줄기를 찾아 올라가 보면 피눈물과 땀에 얽히고 설킨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제 시대36년 동안의 그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우리의 선배요 선각자였던 수많은 주의 종들이 순교라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하나님을 믿고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96년 전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출생했다. 웅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500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평안북도 오산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오산학교에서 청년 주기철은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李昇薰18641930) 선생님과 고당 조만식(曺晩植18831950) 장로님으로부터 나라사랑과 민족정신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오산학교 교장이시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과 청년 주기철의 만남은 뒷날 두 사람이 평양 
산정현교회에 가서 순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연을 맺게 해 주었던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된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이는 선각자요, 민족주의적인 스승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는 묘하게 작용을 하였다. 어렸을 때 앓았던 안질 때문에 도저히 더 책을 읽거나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결국 청년 주기철은 청운의 꿈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낙향한 주기철에게는 전혀 다른 길이 하나님께로부터 예비되어 있었다.

  (1) ▶ 30대 초반 목회자의 첫 번째 도전
  고향인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만들어 젊은 청년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에, 마침 31운동이 터졌다. 이 운동에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던 젊은 주기철은 처음 경찰서에 붙들려 가서 2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르는 가운데 자신의 인생관에 큰 변화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출옥하자마자 마산 문창교회에 있었던, 당대의 대부흥사 김익두(
金益斗18741950)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젊은 주기철은 성령의 감화를 받고 성직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눈병이 다 나은 뒤에 고향사람들에게는 다시 연희 전문 상과에 복학한다는 말을 하고는 서울을 건너뛰어 평양까지 가서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5년 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주 목사님은 부산 초량교회에서 6년, 그리고 곧이어마산 문창교회에 가서 다시 6년간 시무를 하셨다. 초량교회와 문창교회 시무 12년 동안 이미 주 목사님은 신사참배에 대한 확실한 태도를 밝히면서, 신앙진리의 수호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셨다.
  
1929년, 목사님이 경남노회 부회장 시절에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정식으로 제출하여 이것을 가결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30대 초반의 젊은 목회자였던 주 목사님의 일본 제국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이었다. 그는 한국교회의 진로와 이 시대 최후의 보루로서 한국교회의 사명이 곧 신사참배 반대운동임을 깨닫고 그 운동에 앞장서신 것이다.
  당연히 일본 경찰은 이러한 주 목사님의 거동에 주목하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1935년 5월 주 목사님이 경남노회장 시절이었다. 지금 이북에 있는 금강산 온절리에 장로교 목회자들을 위한 수양관이 있었다. 이 수양관에서 하기수련회가 개최되었는데, 전국 250명의 목회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강사로 초빙되었던 주 목사님은「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셨다.
  이 설교의 요지는 “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침례인 요한은 동생의 아내와 간통한 헤롯왕을 그 면전에서 책망하였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통치자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침례인 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할 말을 다 하였고, 그 일사각오 연후에 선지자의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왜 못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가 되어 떨고만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감시하고 있던 일본경찰에 의해서 주 목사님의 설교는 여기서 중단이 됐다. 주 목사님은 강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그 날 모였던 
250여명의 목회자들은 다 강제 해산 당하고 말았다.
  이 설교는 오랫동안 이 세상에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79년 4월 주 목사님 35주년 추도예배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렸을 때에 작고 하신 새문안교회 당회장이었던 강신명(姜信明19091985) 목사님께서 옛날 케케묵은 기독교 잡지에서 주 목사님의「예언자의 권위」라는 이 설교를 발견해서 그 날 추도예배 때에 읽어주심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그런 설교였다.「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의 설교였지만, 지금은 ‘중단된 설교’는 별명으로서 널리 많이 알려져 있다.

  (2) ▶ 순교의 첫길
  당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일컫는 ‘거룩한 도성’(聖都)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이 한국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교회를 굴복시켜서 한국 교회를 어떻게 하든지 일본의 우상 앞에 굴복시키려는 계책을 세웠다. 평양교회를 굴복시키는 것만이 곧 상징적으로 온 조선의 교회를 굴복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에 평양에 대한 박해가 가장 심했다.
  이토록 절박한 처지에 빠졌던 평양교회는 이 시련과 환난을 극복해 주고,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해 주며, 일본의 태양신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그런 영적 지도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래서 평양 산정현교회 수석 장로였던 고당 조만식 장로님께서 옛날 오산학교 제자였던 주기철 목사님을 생각해 내셨다. 그리고 조 장로님이 몸소 마산 문창교회까지 내려와 주 목사님을 평양 산정현교회 당회장으로 초빙하였다. 주 목사님은 존경하는 스승의 간청에 기꺼이 응해서 
1936년 여름 당신이 피흘려 묻힐 평양에 입성해서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셨다.
  이제 주 목사님이 평양에서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십계명에 입각한 성경적인 신앙을 고수하는 일이었다. 또한 산산이 부서져버린 한국교회에 마지막 그루터기로 남아 일본의 우상과 최후까지 싸우고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며, 한국교회의 빛나는 전통을 단절없이 이어가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주 목사님이 평양에서 해야 할 사역이었다.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같이 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다.”

  이것이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첫 날 강단에 서서 외친 첫 설교였다. 산정현교회가 이 신사참배 항거 운동으로 일본의 첫 번째 화살을 받게 된 것은 주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한지 1년 반 되었을 때였다. 그 때 산정현교회는 5층 건물로 크게 신축하였다. 당시에는 한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지었다고 했다. 그렇게 큰 교회를 지어놓고 그 헌당예배를 드리기 15분 전에 경찰에 의해서 주기철 목사님이 갑자기 구속되는데서부터 그 환난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구속의 사유는 그 전전날 평안북도 선천에서 평북노회가 어쩔 수 없이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신사참배를 찬성 결의하는 불상사가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 소식이 뉴스와 신문으로 보도되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분기했다. 당시 평북노회장이었던 김XX 목사님이 몇 해 전에 평양신학교를 방문하여 기념식수한 소나무를 도끼로 찍어버리고 말았다.
  일본 경찰은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 데모를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이것이 크게 번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 신학생들을 모두 체포해 평양 남산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가하면서 그 배후 인물과 주동 인물을 캐내기 시작했다. 거기서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의 이름이 거명되었다. 그러자 경찰은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주 목사님을 첫 번째로 구속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산정현교회 헌당예배는 당회장 목사님이 안 계신 가운데 눈물 속에 거행되었다. 또한 이것은 앞으로 닥칠 ‘
7년 동안’ 산정현 교회 고난의 시작이었고, 주 목사님에게는 순교의 첫 길이기도 했다.
  주 목사님의 두 번째 구속은 첫 번째 구속에서 풀려난 다음, 
1938년 9월 예수교 장로회 27차 총회가 평양에서 거행되기 두 달 전에 집행되었다. 이 때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지 기독교의 본산인 이 평양에서 신사참배 찬성결의를 하게 하고, 한국교회를 일본의 신 앞에 굴복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력히 반대할 것을 추측되는 주 목사님과 몇몇 목사님을 사전에 검속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본 경찰은 각 도의 노회 총대가 평양으로 모여들었을 때 목사님이나 장로님 한 분당 양 옆에 두 사람의 형사를 동행시키면서 계속적으로 협박하였다. 한국기독교사의 기록으로는 
1938년 9월 전국 27개 노회에서 목사 86명, 장로 85명, 그리고 선교사 22명, 도합 193명이 참석한 가운데, 그 사이사이에 일본 고등계 형사97명이 자리잡은 가운데서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서 어쩔 수 없이 아래와 같이 성명서를 낭독하면서 신사참배를 정식으로 결의하고 말았다.

“우리들 목사는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신앙문제도 아니요,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는 것도 아니라고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해서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에서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합니다.”

  이렇게 미리 짜여진 성명서를 낭독하고 전국 27개 노회장이었던 목사 27명은 장로회 총회를 대표해서 평양 신사에 직접 가서 큰 절을 하게 되었다.

  (3) ▶ 어머니의 기도
  이 신사참배 문제로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이 평양 남산 경찰서에 두 번째로 구속되자 어머니 오정모 사모님은 담요 한 장을 똘똘 말아 가지고 교회로 가셨다. 강단 바로 밑에 담요를 깔아 놓고 아버님이 출옥하실 때까지 그곳에서 철야기도와 금식기도를 계속하셨다.
  장로교 총회가 모여 신사참배가 찬성 결의되기 전날 밤, 어머니는 내일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계셨다. 그런데 아마 밤 열 두 시쯤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좀 피곤하였던지, 꾸벅꾸벅 졸았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산정현교회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란다. 그러자 발자국 소리가 뚜벅뚜벅 나더니 어머니 바로 뒤에 와서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혹시 교인들이 왔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똑같이 생긴 쌍둥이 주 목사님 세 사람이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
어느 분이 진짜 제 남편 주 목사님입니까?”하고 물었단다. 세 사람의 주 목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어머니 얼굴만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돌아서더니 뚜벅뚜벅 걸어서 산정현교회 문을 나서서 저 남쪽으로 달음박질하여 뛰어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주 목사님, 주 목사님 저를 버리고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몸부림치고 소리치다 깨보니 꿈이었다.
  어머니는 무언가 불길한 꿈 같아서 “
이거 혹시 오늘 신사참배가 찬성 결의되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하며 한참 기도를 하였다. 그러다가 새벽 다섯시가 좀 지나서 또 육신이 피곤해서 잠깐 졸았다고 한다.
  이번에는 뒤에서 문 여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리더란다. 발자국 소리도 가만가만 어머니 뒤에 오길래 “
또 주 목사님이 오시는가?” 싶어 돌아보니 머리를 빡빡 깎은 학생 하나가 어머니 앞에 와 어깨를 탁탁 치는 것이었다.

“오집사, 왜 잠만 자? 일어나 ‘호세아 9’을 읽어. ‘호세아 9’을 읽어.”

  이 두 마디를 하고 일어나 나가더라는 것이다. 어머님은 놀라서 전기 불을 켜고 ‘호세아 9장 1절에서 3절’을 찾아 읽으셨다.

1 오 이스라엘아, 너는 다른 백성처럼 기쁨으로 즐거워하지 말라. 이는 네가 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행음하였으며 네가 모든 타작마당에서 보상을 사랑하였음이라. 타작마당과 포도즙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이스라엘 안에서 새 포도주도 동이 날 것이라. 그들은 의 땅에 거하지 못하리니, 에프라임은 이집트로 돌이킬 것이며 그들이 앗시리아에서 불결한 것들을 먹으리라. 』

  어머니는 이 성결구절을 읽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 날 오후에 열리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일본의 계략대로 가결되고,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떠나시는 것으로 그 꿈을 해석하셨다. 나는 어머니께서 대성통곡을 하며 기도하다가 그 날 아침에 집으로 돌아와, 여러 제직들과 앉아서 이 꿈 이야기를 하시는 것을 어렸을 적에 엿들은 기억이 난다.
  이렇게 해서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가 일본의 계략대로 가결되자 그들은 곧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을 석방했다.

  (4) ▶ 농우회 사건과 고문
  그런데 한 달 뒤에 경상북도 의성교회에서 유재기(柳載奇일본식 이름天城虛心,19051949) 목사님이 일으켰던 농우회 사건이 터지면서, 주 목사님은 세 번째 구속되었다. 이번에는 평양경찰서가 아닌 경북 의성경찰서로 압송을 당했다.
  이 농우회는 
1930년대 평양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일종의 농촌계몽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밑바탕에는 조선독립과 민족운동이 깔려 있었다. 신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기에 당연히 신앙운동까지 곁들여 있었다. 이들은 조만식 장로님을 농우회 회장으로 추대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전국 각지로 흩어지면서 자기가 담임 맡은 교회서 형편에 따라 이 농우회 운동을 계속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그러던 가운데 의성교회 담임목사가 됐던 유재기 목사님은 의성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다가 그만 일본 경찰에 탐지되었다. 그래서 일대 검거 선풍이 일어나 경북 의성교회의 목회자들과 젊은 청년들이 전부다 체포되고, 갇히게 되었다. 일본경찰은 그 배후 인물에 회장이 조만식 장로님이셨기 때문에 평양과 연결이 되어 있다 싶어 온갖 고문을 다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입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이름이 거명되자, 그들은 즉시 주 목사님을 의성으로 압송한 것이다.
  평양과 경북 의성경찰서는 합동으로 주 목사님께 농우회 사건이라는 올가미를 뒤집어 씌우면서 또 한편 신사참배 문제까지 결부시켜 주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갖은 고문을 다했다.
  
7개월 동안 주 목사님이 잡혀 계셨던 의성경찰서에서의 고통은 아마 가장 혹독한 고통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주 목사님의 일대기 영화인「저 높은 곳을 향하여」영화에서의 고문 장면이 바로 의성경찰서에서 당하신 고문을 시나리오로 재현한 것이다.
  아버님은 온갖 고문으로 몸이 찢기고, 손
발톱이 다 빠지고, 하루에도 기절하기를 여러번이었다. 배고픔과 추위와 육신의 고통에 죽음의 고비를 여러번 넘겨야 했던 어려운 처지에 계셨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기독교 역사의 기록에 보면, 경북 의성경찰서에서 한 목사님은 그 지하 고문실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들것에 실려 바로 공동묘지로 직행했다.
  또 한 젊은 목사님은 고문 끝에 들것에 실려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일만에 그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한 전도사님은 고문 끝에 정신이상이 생겨서 정신병원에서 그 마지막을 쓸쓸하게 보내다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 목사님은 뒷날 산정현교회에 돌아와서 이때의 고통을 이렇게 술회하셨다.

7개월 동안 의성에서 받았던 육체적인 고통은 그래도 견딜 수가 있었는데, 정신적인 고독감은 정말 견디기가 어려웠다. 70여명의 동지가 하루 아침에 다 잡혀 왔고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동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일본에 항복하곤 했다.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두 사람의 동지가 나가버리고, 또 하룻밤 자고 나면 또 나가버리고...12월이 다 돼 가니까 그 수많은 동지가 다 나가버리고 마지막 네 명이 남아 끝까지 항거했는데, 그때 받았던 정신적인 고독감, 외로움은 정말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끝끝내 주 목사님은 이 죽음의 시련을 이겨내셨다. 혐의를 잡지 못한 경찰은 어쩔 수 없이 7개월 만에 주 목사님을 석방하게 되었다. 1939년 6월 첫 번째 주일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밤열차를 타고 주일 아침 10시 조금 지나서 평양역에 내리셨다. 나는 그때 산정현교회 교인의 손에 끌려서 평양역에 나갔다가 7개월만에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처음 뵈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 그 무릎에 앉아서 텁수룩하게 난 아버님의 수염을 매만지면서 산정현교회로 돌아온 추억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5) ▶ 유언과 같은 설교
  산정현교회 지천에 있는 목사관에는 우리 할머니께서 7개월 동안 못봤던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목마르게 기다리고 계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쪽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감옥에서 입고 나온 옷 그대로 산정현교회 강단 위로 바로 올라가셨다.
  
7개월만에 목사님이 돌아오시자 산정현교회는 성도 1천여명, 그리고 주 목사님의 석방 소식을 듣고 그 날 모여들었던 주변 교회와 평양시민까지 합쳐서 1천여명, 도합 2천여명의 성도들이 산정현교회 2층과 3층을 꽉 메웠다. 또 평양경찰서, 대동경찰서가 주위를 포위한 채 7개월만에 돌아오신 주 목사님의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인지 모두 귀를 귀울이고 있었다.
  이 날의 설교는
「다섯 제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였는데, 차라리 기도에 가까웠다. ‘로마서 8장 1832, 39’의 성경을 인용하신 다음, 이 기도가 7개월 동안 의성경찰서에서 늘 기도하던 다섯 가지의 기도제목이며, 동시에 이것은 자신에게 유언과 같은 설교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설교하셨다.

『 첫 번째 나의 기도는, “죽음의 권세에서부터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저는 지금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이 다 부음 앞에서 떨고 슬퍼만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이 무서워 제가 의를 버리고 이 죽음을 면하려고 저의 믿음을 버리지 않게 주님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거늘 어찌 제가 이 죽음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 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열 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제가 백년 천년 산들 그것이 무슨 삶이리요.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니 이 목숨 아끼다 우리 주님 욕되지 않게 사망의 권세에서 저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번째 나의 기도는, “장기간의 고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입니다. 한두 번 받는 고난은 혹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견디기가 참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도 한두 번이라면 당할 수 있겠지마는 
1년, 10년 계속되는 오래 끄는 고난이라면 견디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하겠지만, 제 말 한마디 타협하거나, 저의 고개 한 번 까딱하면 이 형벌을 면할 수 있다고 생각될 때 그 어느 누구도 넘어지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저 같은 약졸이야 이루 말해 무엇하리요. 다만 내 주님만 의지하오니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가야 70생이요, 장차 받을 영광은 주님과 더불어 영생불사의 몸이 될 것이라.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보고 나아가오니 이 몸을 붙들어 주사 이 환난을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 번째 나의 기도는, “내 어머니와 내 처자를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저에게는 
70이 넘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와 아들 넷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자식으로서의 의무도 지중하고, 한 남편과 아비된 책임도 무거워 더욱 괴롭습니다.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상할 때, 제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겠습니까? 또 제 아내는 병약한 사람으로 일생을 나를 위해 바쳤거늘 나는 남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고, 아버지로서의 자식을 키우고 돌보아야 하는 의무마저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짐승도 제 새끼를 사랑할 줄 알거늘 어린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지 아니할 수 없는 이 마음 한없이 괴롭습니다. 자비하신 내 주님께 부탁하오니 인정의 젖줄이 저를 얽매이지 않게 기도합니다. 순교자로서 갖춰야 할 초인적인 용기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네 번째 나의 기도는,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시옵소서”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 백성은 나라에 대한 충절의 의가 있고, 여인이라면 남편에 대한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의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다른 신에게 저의 정절을 깨지 않게 하옵소서. 이 몸이 어려서 주 안에서 자랐고, 주 앞에서 헌신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어떤 환난이나 곤경이나 박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 앞에서라도 내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끊을 수 없으니 오직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시옵소서.
  다섯 번째 나의 마지막 기도는,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옥중에서든 사형장에서든 제 목숨 끊어질 때 저의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쓰러질 때 저의 영혼을 내 주님께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곧 나의 고향이요, 아버지의 집이 곧 나의 집입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이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의 황금길을 걷게 하옵소서. 죄악에 오염된 이 세상에서 나를 온전케 하사 하늘나라의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영혼을 오직 나의 하나님께 부탁합니다. 아멘. 』

  이 날 이미 순교를 각오했던 주 목사님의 이 설교는 2천여명의 모든 청중에게 울음바다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고 온 교우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더해 주었다. 의성경찰서에서 석방된 아버지는 6개월 정도 가족과 함께 계실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지께서 나와 가장 오래 함께 계셨던 때였다.

  
(6) ▶ 산정현교회의 폐쇄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했던 그 분은 무너져가는 한국교회와 동료 교역자의 믿음의 배신에 끊임없이 질타를 가하셨다. 그러자 주 목사님의 입을 틀어막고 강단에 다시 서지 못하게 하고자 일본 경찰은 온갖 공작을 자행했다. 산정현교회의 당회원 장로들에게 주 목사님을 해임 처분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산정현교회의 수석 장로는 앞서 밝혔듯이 조만식 장로님이셨다. 그리고 
오윤선(吳潤善18931960)장로님이라고 계셨다. 이 분은 조 장로님과 호형호제하던 사이로 해방 이후 조 장로님이 평남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을 때 부위원장이 되셨던 분이었다. 또 김동원(金東元?∼?) 장로라는 분도 계셨다. 이분은 이미 독립운동으로 2년이나 옥살이를 하고 나오신 분이었다.
  이 분은 해방 이후에 월남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국회의장일 때, 부의장이셨던 분이시다. 또 
유계준(劉啓俊18791950) 장로님은 625사변 때 순교하셨는데, 그 당시 벌써 평양을 거쳐가는 모든 독립군에게 독립군 자금을 대준다는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민족주의자였다.
  이처럼 평양 산정현교회의 장로님들은 모두 당시의 애국주의자요,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였던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주기철 목사님을 중심에 놓고 신사참배 항거운동을 하면서 일본과 항거하셨던 것이다. 그런 장로님들이었기에 아무리 일본 경찰이 강압식으로 주 목사님을 파면 처분하라고 해도 들을 리 없었다.
  일본 경찰은 어쩔 수 없이 제일 약해 보이는 평양노회로 하여금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 처분하게 하기로 계책을 세웠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주 목사님을 네 번째 구속해서 평양경찰서에 잡아 가두었다. 그 해 
12월 일본 경찰에 의해 소집된 평양노회는 강압에 못 이겨 주기철 목사를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에서 파면 처분했다. 또한 당회원 일곱 장로님들을 정직 처분하고, 노회에서 임명한 장XX목사를 산정현교회의 임시 담임목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일곱 사람의 수습위원 목사를 두어 산정현교회를 접수하게 하였다.
  석 달 뒤, 1940년 3월 26일 부활주일 아침이었다. 당회장 목사님이 없고 일곱 장로님이 정직 처분되어 교회에 못나오니까, 안수집사님이 나와 부활주일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다. 당시의 찬송가 204장,(통일 찬송가 384/영광을 주께 63 <말씀보존학회 刊>)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다같이 부르고 있는데, 갑자기 교회 문이 열리면서 일본 형사대가 들어와서 교회를 포위했다. 그리고 노회에서 임명한 일곱 목사님이 들어와 강단을 점령하고, 그 중의 한 목사가 나와서 사회를 보고, 한 목사가 찬송가 인도, 한 목사가 기도, 한 목사가 성경봉독, 그리고 최XX목사가 나와서 설교를 하였다.
  교인 
1천여명은 양재헌 안수집사님의 인도에 따라 그 예배가 끝날 때까지 1시간20분 동안내 주는 강한 성이요찬송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불렀다. 일본경찰의 명령, 평양노회의 권위도 산정현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안 통했다. 일본 경찰은 그것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안 되니까 전부 다 내쫓고, 그 날 젊은 제직들 20여명을 전부 경찰서에 잡아 가두었다. 그리고는 산정현교회에 큰 못을 박아 교회를 완전히 폐쇄 처분하고 말했다.

  (7) ▶ 목사관에서 쫓겨나다
  2주일 뒤, 목사 두 사람과 형사 열 다섯 명이 우리 집으로 갑자기 쳐들어 왔다. 그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감옥에 계시고, 집에는 나와 바로 위의 형과, 할머니, 이렇게 셋밖에 없었다. 두 목사님은 주머니에서 쪽지를 하나 끄집어내서 펴놓고 읽고서는 우리에게 주었다. 그 쪽지는 ‘주기철 목사가 산정현교회에서 파면 처분 당했으니 이제 목사도 아니니 사택에 있을 자격도 없고, 평양노회에서 이 사택을 평양 신학교 교수 사택으로 이 목사관을 이용하기로 했으니 오늘 당장 나가달라’는 이른바 “목사관 전도명령서”였다.
  할머니께서 문고리를 붙잡고 “
하나님이 주신 집인데 주 목사가 와서 같이 나가자고 하기 전에는 내가 나갈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자 형사 한 사람이 할머니를 번쩍 안아다가 대문 밖에다 내팽개쳤다. 그리고 우리를 강제로 대문 밖으로 내쫓고, 그들이 가져온 손수레 두개에 짐을 싣고 거기서 10분 거리에 있는 어느 기생집 단칸방에다 우리를 전부 쫓아내었다. 그리고 그 목사관까지도 완전히 폐쇄 처분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 동안 우리 가족의 박해와 유랑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해방될 때까지 열세 번 이사를 해야 했는데, 그것은 일본형사의 감시 아래 있는 사람에게 자기 집을 빌려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평양 산정현교회 성도들도 교회를 잃어 버린 채 멀리서 교회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새벽이면 교회에 와서 교회 벽돌을 붙잡고 새벽기도를 드렸다. 이런 환난이 그 뒤 5년 동안 계속되었다.
  
1940년 4월 아버지께서 목사직에서 파면 처분 당하고, 목사관 아닌 우리 셋방으로 석방되어 돌아오셨다.

“당신은 산정현교회에서 파면 당하고, 이제 목사도 아니고, 그러니 당신이 설 강단도 없고, 당신이 떠들어 대봤자 별 수 없다. 당신만 신사참배를 안하면 돼. 그것이 죄라고 남에게 선동만 하지 않는다면 가족과 더불어 고향에 가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일본 경찰이 주 목사님에게 한 회유였다. 그러나 이 진리의 파수꾼이자, 믿음의 용사는 승복할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서야 할 강단이 없었지만 그가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강단’이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는 곳에는 복음의 진리에 굶주렸던 어린양들이 몰려와서 대군중을 이루었다. 그때마다 목자이신 주 목사님은 그 수많은 양떼를 향해서 이렇게 외쳤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피 흘려 죽으셨는데, 내 어찌 이것이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 할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

  그는 이렇게 수없이 조그만 방에서, 조그만 마당에서, 길거리에서 외쳤다. 이러한 아버지에게도 오직 한 가지 당신의 늙은 어머니와 병든 아내와 어린 자식이 가슴에 걸림돌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인정이었다. 그분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은 견딜 수 있으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철석같은 마음이 깨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돌아서는 자 또한 많이 있습니다. 이 육신에 얽힌 정에서 나를, 나를 풀어주시옵소서.”

  사실 나의 아버님의 순교의 뒤안길에는 이러한 인정의 애환이 잔잔히 깔려 있었다.


 (8)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다섯번째 구속되기 직전 주 목사님은 늙은 어머니에게 작별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오시자 몸져누워 계신 할머니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큰 절을 하였다. 할머니를 향하여서 아버지의 마지막 고별인사는 딱 이 한마디였다.

“어머니, 하나님께 어머니를 맡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가까이 불러 모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으시고는 우리를 위해 잠시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 불의한 이 자식은 제 어머니를 봉양하지 못합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당신의 아픔도 잊으시고 십자가 밑에서 애통해 하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보시며 제자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당신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오 주님, 내 어머니를 내 주님께 부탁합니다. 불의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자비하신 주님의 보호하심이 더 나을 줄로 믿고 내 어머니를 무소불능하신 당신께 부탁하옵고, 이 몸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갑니다.”

  그 날 마침 20여명의 산정현교회 제직들이 찾아와 있었다. 모두 다 슬픔에 찬 얼굴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경 찬송가를 양측에 끼고 나오시던 아버지는 그분들을 보시자, “우리 다 같이 찬송가 한 장을 부릅시다.” 하셨다. 당시 찬송가333장,(통일 찬송가 543/영광을 주께 291 <말씀보존학회 刊>)저 높은 곳을 향하여였다. 아버님이 아마도 그렇게 좋아하신 찬송가가 없었을 것이다. 집에서도 언제나 그 찬송가를 부르셨다. 그래서 아버지의 일대기 영화를 촬영할 때 내가 영화 제목으로「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고 붙이자고 제의했었다. 찬송가를 다같이 부르고는 성경 한 구절을 찾아 읽어 주셨다. ‘아모스 8 1113절’이었다.

11  하나님이 말하노라, 보라, 그 날들이 오리라. 내가 그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의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라 오직 의 말씀들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니라. 12 사람들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방황할 것이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달릴 것이나 그것을 찾지 못하리라. 13 그 날에는 아름다운 처녀들과 청년들이 갈증으로 인하여 기진하리라.』

  이 말씀을 읽으신 다음 마지막 설교를 하셨다.

『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이 수욕을 내가 피하여 이 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내 평안과 내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내가 준 그 고난의 잔을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져야 할 이 십자가, 주님이 주신 이 십자가를 제가 피하였다가 주님이 이 다음에 “너는 내가 준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제가 어떻게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오직 저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

  이것이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께서 산정현교회 성도들에게 하고 간 마지막 말씀이셨다. 이것이 마지막 대면이었고, 또한 그분이 햇빛을 본 마지막 길이었다.

  (9) ▶ 고문과 승리
  주 목사님을 파면 처분하고, 교회를 폐쇄하고 목사관 사택에서 우리를 쫓아내고, 주 목사님을 구속한 일본 경찰은 최후의 발악으로 이제 주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온갖 고문을 해댔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이 목사님의 피를 말렸다.
  나는 어머니께서 면회가실 때는 악착같이 따라 나서서 같이 경찰서로 가곤 했다. 사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머니께서 면회를 하고 난 다음에 맛있는 음식을 아버지께 드리는데, 아버진 한참 잡수시다 어린 내가 옆에서 침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시곤 그걸 미쳐 못 드시고 남겨서 내게 주곤 하셨는데, 그게 그렇게 먹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서 언제 면회가시나 기다렸다가 꼭 따라 나서곤 했다.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께서 신사참배 문제로 감옥에 들어가신지 7년만에, 그러니까 내가 열네 살(14세) 때 해방이 되었다. 나는 국민학교 전 과정을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그대로 집에서 놀며 지냈다. 물론 해방이 되고 나서도 국민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중학교에 입학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늘 나는 그 당시에 집에서 어머니의 눈치만 보고 있다가 면회 갈 때 따라가곤 하는 것이 일이었다.
  면회 때마다 언제나 아버지는 어머님께 야단치는 것이 있었다. “왜 옷에 솜을 이렇게 두툼하게 넣어와서 날 괴롭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서는 “다음에 옷을 차입할 때 옷에 솜을 많이 안 넣겠다”고 약속하면서 옷을 갈아 입히셨다. 갈아 입히시고 밖에 나오시기만 하면 어머니는 늘 한탄을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이야, 옷에 솜도 안 넣으면...”

  아버지께서는 고문실에서 한참 매를 맞고 피를 많이 흘리시는데, 그 피가 두터운 솜에 전부 스며들어가 그게 빨리 마르지를 않았다. 그게 자꾸 반복되다 보니까 상처가 났다가 곪아서 고름이 터져 나오고 해서 피와 고름이 묻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창 고문을 하다가 기절하면 찬물로 붓는데 그 찬물이 또 옷에 베어서 옷은 피, 고름, 물 해서 늘 젖어 있었다. 평양이 겨울에는 영하 25도를 밑도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면 그 옷이 다 얼어서 판처럼 뻣뻣해져 버린다.
  아버지께서 감옥에 계실 때 하루에 두 번씩 간수가 와서 먹을 음식을 창문으로 끼워주는데, 그걸 먹으러 가려면 언제나 기어서 가야 했다. 그럴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 상처가 스쳐서 아물어가던 상처가 또 터져서 피고름이 나곤 해서 아버지는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제발 옷에 솜을 좀 넣지 말아 달라고 했던 것이다. “솜을 안 넣으면 피가 흘러도 시멘트 바닥으로 다 흘러버릴 것이고, 물을 부어도 금방 말라 버릴 테니까 그 고통을 안 당할 것인데 왜 자꾸 솜을 넣느냐?”는 것이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밖에 나오셔서 날 붙잡고는 하소연하셨다. “솜을 안 넣으면 어쩌라는 말이냐? 그 추위에 며칠 안되어서 살이 다 얼어서 썩는데 그보다는 차라리 솜이 있어서 고통을 좀 당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며 한탄하셨다.
  참으로 주님의 도움과 위로가 없었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런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주 목사님은 그 고통의 십자가를 끝끝내 계속 가까이 붙드셨다. 눈물의 기도로 언제나 그 고통을 이겨 내면서 주 앞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셨다.
  이제 산정현교회와 나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실 그 고난의 십자가를 주 목사님 혼자서 지고 가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주 목사님의 옥중 투쟁은 어머니의 내조와 산정현교회 당회와 제직과 성도들의 뒷받침과 그분들의 침묵의 항거로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주 목사님의 십자가를 나누어 지고 갔던, 또 한 사람의 쿠레네인 시몬과 같은 나의 어머니는 보통 ‘기도의 어머니’란 별명이 붙어 있었지만, 육신이 너무나 연약한 분이다. 그러나 나약하게 보였던 이 여자에게 남편을 위한 기도와 교회에 대한 섬김은, 남편을 순교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 만큼 큰 힘이 되었다. 
  아버지께서 7년간 감옥에 계시는 동안 어머니는 단 하루도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질 않았다. “남편이 찬 방에서 자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더운 방에서 잘 수 있겠는가?”해서 꼭 골방이나 마루방에 올라가 방석도 깔지 않은 채 거기서 늘 기도하면서7년을 하루같이 지내셨다. 남편 못지 않게 10여 차례나 경찰에 감금되어서 갖은 수모를 다 당했다. 남편을 대신해서 목자 잃은 양들을 심방하는 일, 주 목사님과 문 닫힌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끝없이, 쉴 새 없이 하는 기도, 그리고 남편을 옥바라지하는 것이 그의 생활의 전부였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남편의 투쟁과 승리가 곧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승리가 어머니에게는 ‘남편의 순교’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연약한 여자에게 그토록 강인한 믿음, 그리고 7년을 하루같이 싸워서 일본제국을 이기게 했던 그 힘의 원천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그저 쉽게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세상적으로 말하면 어머니를 둘러싸고 있던 아주 위대한 힘의 원천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산정현교회 당회와 제직과 성도들의 뒷받침과 보살핌이었다.
  주 목사님이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에서 파면처분 당한 뒤에 조만식 장로님께서 우리 집에 계속 사례비를 갖다 주시자 일본 경찰은 그것을 강력히 막았다. 그때 조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완강히 거절하셨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옛날부터 의리와 윤리가 있는데 어찌 스승이 제자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단 말이요. 이것은 정치와 도덕, 사상, 이 모든 것을 떠나서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요.”

  특히 산정현교회 여러 성도들, 제직들, 여집사님들의 열심은 이루 말로다 할 수 없다. 7년동안 우리가 열세 번을 이사하는 동안에 우리집은 언제나 산정현교회 성도들로 꽉꽉 찼다. 물론 일본 경찰들은 그들을 가만 나두지 않았다. 전부 잡아가서 48시간 동안 유치장에 가두고 고문을 했다. 그리고 48시간 후에는 여자 같으면 남편이나 아들을 불러서 ‘주기철 목사 집에는 다시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하고 풀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풀어주면 이 분들이 우리 집 근처 산정현교회 성도집에 숨어있다가 저녁에 통금시간이 돼서 형사대가 철수하고 나면 또 우리 집에 몰려왔다. 밤도 없고 새벽도 없고 낮도 없었다. 그저 몰려와서 예배드리고 같이 기도하고 어머니를 격려해 주었다. 늘 이러면서 같은 신앙생활을 했다.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 집에는 쌀이 다 떨어졌다. 쌀 배급이 없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다 없어졌는데 너무너무 배가 고프고 답답했다. 우리 집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평양 목장이 있었는데 산정현교회 안수집사님이 경영하고 있었다. 그 목장에 가면 큰 창고가 있었다. 거기에는 소 먹이로 주려고 가을에 추수한 볏단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바로 위에 형하고 둘이서 그 볏단을 가지고 와서 창고 문 앞 바위에다 대고 두 시간 정도 털었더니 조그만 그릇에 벼알이 좀 담겼다. 둘이서 창고 밖에서 장도리로 가루를 내어 집으로 가져가곤 했다. 어머니는 그걸 가지고 죽을 쑤어 할머니 한 그릇, 나 한 그릇, 작은 형 한 그릇 해서 세 그릇을 떠놓고는 이틀 먹을 것, 혹은 어떨 때는 하루 먹을 것이라며 주셨다.
  죽 한 그릇으로 이틀 견디려니까 도무지 속이 차지 않았다. 열 살 때인데 한번은 아주 오기가 났다. 내가 내일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한번 배나 불러보자고 죽을 한 그릇 쫙 들이켰다. 이튿날이 되니까 굶어야 되는데 당장에 배가 고파왔다. 그런데 보니까 할머니 죽 그릇은 그대로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가 굶고 있는 걸 보니 너무 불쌍해 보였던지 어머니께서 잠시 부엌에 나간 사이에 죽을 조금 떠서 내 그릇에 옮겨 주셨다.
  어머니께서 들어오셔서 내 그릇에 죽이 담겨있는 것을 보셨다. 어머니는 “네 죽은 이미 다 먹었는데 왜 할머니 옆에 앉아서 할머니 죽을 뺐어 먹고 있느냐. 당장 나가거라!”고 호통을 치셨다. 할머니는 어머니를 향해서, “손자가 배고픈데 먹을 것을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이 추운 날에 아이를 밖에 내쫓느냐?”고 하셨다. 이처럼 나 때문에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자주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우리 집에 쌀이 떨어진 것을 눈치 채었다. 교인들은 그날 밤부터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집 담장 너머로 주머니를 던지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두개 어떤 때는 하루에 서너 개씩 던져졌다. 그것을 가지고 방에 들어와 열어보면 수수, 보리, 콩, 조, 팥 같은 곡식들이었다. 어떤 날은 쌀이 들어있기도 했는데 그런 날은 아주 생일잔치하는 날이었다.
  들어온 수수를 가지고 어머니는 수수죽을 쑤어서 우리 앞에 놓으면서 늘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꼭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며 교육을 시키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430년 동안 애굽(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출애굽해서 카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면서 만나(manna)를 받아 먹었는데, 바로 너희들 앞에 있는 죽 그릇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떨어뜨려주신 만나다.”

  7년 동안 예배당에는 집회는 없었고, 목사님은 쇠사슬에 얽혀 감옥에 들어가 계시고, 예배드릴 제단은 문이 닫혀 들어갈 수도 없었고 성도들은 뿔뿔이 흔적없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속에 타고 있던 믿음의 횃불은 사시사철 불타고 있었다. 참으로 산정현교회 제직과 성도들의 우리 가족에 대한 보살핌은 어머니로 하여금 일본이라는 그 엄청난 힘의 세력과 싸워 이기게 한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주 목사님을 순교의 길로 인도한 밑바탕이 되었다고 나는 오늘도 굳게 믿고 있다.

  (10) ▶ 고문 현장을 보고 실어증에 걸리다. 
  1년 4개월 동안 주 목사님이 평양경찰서에서 갖은 옥고를 다 치르고 있다가1941년 8월 25일, 이제는 주 목사님이 평양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옮기게 되었다. 평양형무소로 들어간 다음 2년 8개월동안 주 목사님은 일본과 싸우며 자신의 신앙을 계속해서 지켰다.
  아버지께서 평양경찰서에 계실 때만 해도 나는 일주일에 한번, 또는 열흘에 두 번 정도로 아버지의 얼굴을 뵙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평양경찰서를 내 집같이 드나들었었다. 특히 내가 배가 고프면 경찰서로 뛰어갔다. 3층 고등계 형사실에 올라가면 오 형사, 유 부장, 기네마루 형사 등이 죽 앉아 있다가, “어 이놈 광조야, 너 배 고파서 여기 왔지”하면서 죄수를 취조할 때 주는 보리 주먹밥을 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주먹밥을 하나 입에 물고서는 평양경찰서 안에서 마치 우리 집 마당인 양 뛰어 놀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평양형무소로 옮기고 난 뒤로는 2년 8개월 동안 나는 한번도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미성년자였기에 면회가 사절되어서 어머니 혼자 한 달에 한번씩 면회를 가셨다.
  한번은 일본 경찰에서 나와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호출 명령이 와서 경찰서로 가게 되었다. 그 날 나는 3층의 고등계 형사실로 가는 줄 알았더니 올라가지 않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는 평양경찰서에서 제일 무서운 고문실이었다. 거기는 천장이 트여있어서 지하 어느 곳에서든 고문하는 소리가 다 들려오게 되어 있었다. 다 죽어가는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데 그저 자기 자신이 육체적인 고문을 당하지 않고 그 소리만 들어도 벌써 정신적으로 반죽음이 되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는 지하로 내려가다가 왼쪽 방으로 안내받아 들어갔다. 거기 시멘트 바닥에 그냥 앉으라고 해서 우리 세 사람은 그렇게 앉았다. 방과 방 사이에 투명한 유리가 있어서 서로 바라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조금 있으니까 맞은편 방에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드시며 웃으셨다.
  그런데 그들은 아버지를 엄지손가락을 뒤로 해서 공중에 매달아 놓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른바 ‘그네뛰기 고문’을 했다. 발길로 차면 공중에 매달린 채 그네가 되어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벽에는 검도 연습용 칼(죽도)이 일렬로 꽂혀 있었다. 일본 형사들이 그 칼을 뽑아서 검도연습하듯이 칼을 가지고 아버님을 내리쳤다. ‘얏!’하고 기합을 넣어 때리면, 아버지는 그네가 되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날아가고 또 저 쪽에서 때리고 그랬다.
  내가 정확히 세지는 못했지만 스무 번 세기 전에 아버지는 공중에 매달린 채 기절해 버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기절하기 전에, 내 옆에 있던 할머니께서 먼저 고문이 시작되자마자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어머니는 고문이 시작되자 손에 깍지를 끼고는 ‘오, 주님!’하면서 기도만 하셨다.
  아버지께서 기절을 하니까 풀어 놓고 찬물을 끼어 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더니 책상 위에 아버님을 뉘어 놓았다. 그런데 고의로 그런 것인지 책상이 작아서 그런 것인지 목이 뒤로 떨어지게 뉘어놓았다. 그리고는 오 형사가 밖으로 나가더니 노란 주전자에 물을 가득 담고 대접에다 고추가루를 잔뜩 담아와서는 풀더니 코와 입에 그걸 부어 넣기 시작했다. 아버님은 처음에 몇 번 저항하시더니 기운이 떨어지셨는지 그 다음엔 그냥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한 56분이 지나니까 배가 농구공 두개 만큼 부풀어 오르면서 기절했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으셨다.
  형사 둘이서 배 위에 조그만 의자 두개를 얹어 놓고 그 위에 올라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짓눌렀다. 그러자 뒤로 처져 있는 아버님의 입에서, 코에서 귀에서 붉은 물인지 핏물인지 모르게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또 찬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책상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형사 네 사람이 우리 방으로 건너와서 이번에는 어머니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몸이 몹시 가냘프고 약한 분이었다. 그래서 발길로 한번 차면 23미터씩 데굴데굴 구르곤 했다. 어머니를 고문하기 시작하자 이번엔 아버지께서 깍지를 끼고 엎드려 기도만 하셨다.
  어머니를 고문하는 이유는 그러했다. “야, 이년아. 너희 남편 주 목사를 우리가 이렇게 고문하는데 왜 안 데리고 나가는 거야!”하면서 빨리 주 목사를 데리고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집에 데려 갈 생각은 안하고 ‘주여!’ 어쩌고 하느냐?”면서 “남편 말아 먹을 년”이라고 욕을 하면서 어머니를 고문했다.
  가족이 서로 마주 보는 가운데 고문을 함으로써 그 정신적인 고통으로 주 목사님의 항복을 받아내려는 일본 경찰의 잔인한 술책이었다. 사실 이런 고문으로 네 분의 목사님이 굴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꼴은 우리가 도저히 못 보겠으니 그저 고개만 한번 까딱하면 되는데 왜 이 고통을 우리에게 주고 너도 그렇게 고통을 당하느냐”고 해서 그렇게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그 중에 이XX목사님은 그렇게 나와서 이틀 뒤 새벽에 우리 집으로 오셨다.
  와서는 어머니와 손을 붙잡고 두 시간 동안 기도를 했다. “고문을 못이기고 신사참배를 하고 나왔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하면서 얼마나 통회하면서 기도했는지 모른다. 그때만해도 내가 어릴 때라 같이 기도하다가 너무 지루해서 중간에 눈을 뜨고 그 목사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온돌방 방바닥으로 목사님의 눈물, 콧물이 흘러내리는데 그것이 어디까지 흘러갈 것인가 궁금해서 목사님 얼굴 한번 쳐다봤다가, 흘러가는 눈물을 한번 쳐다봤다가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일본 경찰은 그런 고문으로 아버지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지만 아버지나 어머니나 심지어 할머니까지도 그 고통을 잘 이겨내셨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던 할머니는 그 날 그곳에서 나오셔서 근 열흘 동안 거의 정신이 나가셨다. 집 앞에서 아무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는 “우리 주 목사 살려주시오, 주 목사 살려주시오!” 하셨다. 할머닌 언제나 우리 아버지를 늘 그렇게 ‘우리 주 목사’라고 호칭했다.
  열 살 밖에 안 된 어린 나에게도 눈 앞에서 부모가 그렇게 맞고 당하는 것을 본 것은 말 할 수 없는 큰 충격이었다. 당시 현장에서는 정신없이 보고 나왔는데, 나온 다음에는 내게 육체적인 변화가 왔다. 실어증에 걸린 것이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려면 심하게 더듬었다. ‘어머니’'라고 말하려고 해도 ‘어’'라는 말조차도 1분 정도 걸려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34년동안 그 고통을 겪다가 해방이 된 다음에 두세 달이 지나니까 정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1) ▶ 마지막 면회
  아무튼 아버지께서 그래도 경찰서에 계실 때는 그나마 아버지의 얼굴을, 비록 처참하게 고문을 당하는 모습이라 할지라도, 뵐 수 있었다. 그러나 형무소로 옮긴 다음에는 거의 3년 동안 전혀 아버님의 얼굴을 뵐 수 없었다. 다만 엽서 한 장을 주고 받으면서 부자간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때 어머니는 한 달에 한번씩 면회가 허락되어 홀로 아버지 면회를 가셨다. 그런데 1944년 2월에 면회 가셨을 때 아버지께서 그렇게 어머니께 보채시더라고 한다. “요다음 3월달엔 막내 광조를 꼭 좀 데리고 오라”고. “그놈이 그렇게 보고 싶다”면서.
  1944년 3월 31일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굉장히 날이 으스스하고 추웠다. 아침9시에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는데, 하루 종일 굶고 그 날 오후 4시에 아버님과3년만에 면회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정식으로 아버지와 얼굴을 맞대고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호화스러운 면회는 못되었다.
  2월에 어머니께서 면회 가셨을 때 아버지와 사전에 약속을 하셨단다. “3월 면회 때 광조를 면회실 밖에다 세워놓을 테니까 제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밖에 서 있는 광조 얼굴을 한 번 보세요.”라고 어머니께서 면회실에 들어가면서 날더러 그러셨다. “내가 들어가면서 문을 천천히 열테니까 문 안에 있는 너희 아버지 얼굴을 한번 보아라.”
  어머니는 오후 4시에 면회실로 들어가면서 문을 천천히 여셨다.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78미터 앞에 푸른 죄수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은 채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며 웃고 계셨다. 아버님의 얼굴을 3초 정도나 보았을까, 보자마자 어린 마음에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내가 3년 동안 아버지께 큰절을 못했는데 큰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달리 방법은 없고 차렷 자세로 아버지를 향해 90도로 고개를 숙여 큰절을 했다. 그리고 다시 아버지를 보고자 머리를 들었을 땐 이미 아버지의 모습은 없어지고 눈 앞에 붉은 철문이 닫혀져 있었다. 내가 머리를 숙여 큰절을 할 때 안에서 간수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 뭐야, 밖에서, 문 닫아!”

  우리 집에 아버지의 사진이 여러 장 있다. 양복 저고리 입고 찍은 것, 바지 저고리 입고 찍은 것, 두루마리 입고 찍은 것, 외투 입고 찍은 것... 그런데 지금 내 눈 앞에 어른거리는 아버님의 모습이 있다. 내가 꿈에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언제나 내 앞에 나타난 아버님의 모습은 1944년 3월 31일 오후 4시에 불과 34초밖에 보지 못한 푸른 죄수복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으신, 인자하게 나를 보고 웃고 계시던 그 모습이다.
  10여년 전에 영화「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촬영하기 위한 준비 예배를 서울 동신교회에서 드렸다. 주 목사 역을 맡은 신영균씨, 그리고 나의 어머니 역을 맡은 고은아 씨가 나와있었는데, 나는 유족대표로 이렇게 인사를 했다.

“내가 1944 3 31일 오후 4시에 평양형무소 면회실 밖에서 보았던34초간의 아버님의 모습, 그 모습을 이「저 높은 곳을 향하여」영화에서 다시 한번 재현 시켜주면 고맙겠습니다.”

  (12) ▶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나와 아버지의 이 면회가 이루어진 20일 후에 아버지는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하셨다. 4월 20일이었다. 평양형무소 소장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주 목사님이 위독한데 빨리 와서 수속을 밟으면 퇴소를 시켜줄 테니까 평양기독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어머니께서 그 편지를 읽으시더니, “우리 다 같이 하루를 금식기도하자. 아버지께서 위독하신가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날4월 20일 금식기도를 했다.
  다음날 4월 21일에 어머니 혼자서 아버지 면회를 가셨다. 오후 5시 가까워서야 면회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면회 직전에 형무소 소장은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면회한 다음에 병보석 시켜줄 테니까 주 목사를 퇴소시켜서 빨리 기독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좋겠소.” 어머니는 “주 목사님과 의논해서 면회 끝난 다음에 결정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아버님과의 면회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간수의 등에 업혀 나오셨다. 한 간수가 업고 두 간수가 엉덩이를 받치고 나왔는데, 그 주 목사님을 맞이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꼭,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결단코 살아서는 이 붉은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남편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느끼셨겠지만 어머니는 아버지께 이렇게 첫마디를 꺼내셨다. 그 어머니의 말을 받았던 아버지는 거기에 화답하듯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렇소, 내 살아서 이 붉은 벽돌문 밖을 나갈 것을 기대하지 않소. 나를 위해 기도해주오. 내 어머니와 어린 자식을 당신한테 부탁하오. 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산정현교회와 조선 교회를 위해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조선 교회를 구해주기를 바랄 뿐이오.”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간수의 등에 업혔다. 어머니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눈물 섞인 음성으로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씀이 없으시느냐?”고 했더니, 아버지께서는 손을 한번 흔들어 주시더란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돌아보시며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셨다고 한다.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먹고 싶은데...”

  이 말씀이 나의 아버지 주 목사님이 살아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었다. 7년 동안 차디찬 감방에서 아버지께서 그리워했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나는 지난 해 4월 21일 교회에서 추도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다가 아내가 숭늉 한 그릇 주기에 그것을 받아 마시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다음에 내가 죽고 난 다음에 입관할 때 내 가슴 위에다 따뜻한 숭늉 한 그릇 얹어주었으면 좋겠소. 저 나라 가서라도 내 아버지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드리면서 이 세상에서 못다한 효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오.”

  사실 하늘나라에서 따뜻한 숭늉 한 그릇보다 못한 것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분이 자신의 마지막 길을 가시면서 바랬던 그 따뜻한 숭늉 한 그릇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눈물을 흘리곤 한다.
  이 최후의 면회를 입회했던 형무소장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면회 장면에 너무나 감동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어머니에게, “왜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느냐?”고 얘기했다. 그때 어머니는 형무소장을 향해서, “안 모시고 가겠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하십니다.”하는 한 마디로 거절을 하셨다. 이 면회가 이루어진 다섯시간뒤 4월 21일 금요일 밤 아홉시, 해방되기 1년 4개월 전에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은 7년의 옥고 끝에 순교하셨다.
  그때 그 분의 나이 마흔 여덟 살(48세)이었고, 내 나이 열 세살(13세)이었다. 그 다음날 아침 어머니 혼자서 면회를 가셨다.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이미 아버지의 순교를 예측하고 젊은 제직들이 어머니를 따라가서 평양형무소 문 밖에서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이 면회를 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전날 밤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받았다.
  형무소 정문 바로 건너편에는 사과를 파는 집이 하나 있었다. 옛날에는 종이 박스가 아니라 사과 상자가 전부 널판지로 되어 있었다. 산정현교회 청년들이 그 상자를 얻어서 장도리로 못을 치고 해서 임시로 관을 만들었다. 거기에다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서 우리가 살던 셋방으로 돌아왔다.

  (13) ▶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열 세살 난 나는 아버지의 발목을 붙잡고 울고 있었고, 할머니는 가슴을 붙잡고 울고 있었고,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방에 꽉 들어차서 입관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탈지면에 알코올을 묻혀서 얼굴부터 온몸을 씻기시며 수의로 갈아 입히셨다.
  나는 그때 발목을 붙잡고 있다가 갑자기 아버지의 신체를 한번 보고 싶었다. 발이 보고 싶어서 푸른 수의를 걷어올렸더니 발톱이 전부 뭉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 내 뒤에 서 있는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내 아버지의 온전치 못한 발을 보는 것이 부끄럽고 창피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래서 푸른 수의로 싸서 아버님의 발을 꽉 움켜잡았다.
  어머니께서 위에서부터 몸을 다 씻기시고 발까지 내려와서는 나더러 손을 치우라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더러 “아버지 발이 이상해서 뒤에 사람들에게 보여줘서는 안되겠어요.”라고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실어증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말은 안 나오고 펄쩍펄쩍 뒤고 있으니까 어머니는 내용도 모르시고는 보다 못해 화난 듯이 내 손을 확 치셨다. 옷이 벗겨지시면서 어머니도 아버지의 그 발을 보시고는 내 얼굴을 보셨다. 어린 내 심정을 금방 이해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더러 옷을 가져와서 덮으라고 하시더니 뒤에 있는 성도들이 보지 못하도록 위로 약간 쳐들은 채 붙잡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발을 다 씻기고 흰 버선을 신기셨다.
  할머니는 피골이 상접한 가슴을 붙잡고 울고 계셨는데, 어머니께서 울음 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뒤에 있는 성도들과 그저 흐느끼며 우셨다. 그런데 마지막에 수의를 다 입히고 입관하려고 아버지를 들어올리려 하니까 할머니는 아버지를 관에 넣지 못하게 꽉 붙잡고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뒤에 있던 여자 성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만 합창으로 대성통곡을 했다. 그 조용하던 방이 갑자기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어머니는 한 손에 알코올 병을 들고, 한 손에 솜을 든 채로 할머니와 뒤에서 울고 있는 여자 성도들을 번갈아 보시더니 아주 조용히, 그러나 엄숙하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에요.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이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그리고 당연히 가야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 죽었을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닌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쌍한 나의 할머니와 산정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주 목사님은 이렇게 순교했다. 그분이 돌아가셨을 그 당시에는 한갓 불명예스러운 죄수로서 이 세상을 하직한 것같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분은 우리 한국 교회사나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하마터면 끊어질 뻔한 이 신앙의 전통을 단절없이 이어주는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서 훗날 다시 열매가 크게 맺을 것을 기대하며 한국교회를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하면서 저 하늘나라로 가셨다.


  • 1
    • 글자 크기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한계 (by 고봉주) CCM 베스트 찬양 12곡 (by 최고참)

댓글 달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2 소고기 , 돼지고기 부위별 영어이름 및 생선영어이름 서정웅 2012.11.18 179435
341 부라질에서 온 박부영 사모님의 편지 고봉주 2012.03.24 139422
340 필요한 영어 의학용어 서정웅 2012.07.18 82214
339 우리 시대의 성녀(聖女)…소피아(최분이) 수녀 홍우영 2012.12.23 39718
338 어느 불효자(의사)의 때늦은 후회 고봉주 2012.05.06 30783
337 시편 23편3 홍우영 2012.05.10 28108
336 애녹회 여름 나드리 여흥시간 VIDEO 고봉주 2012.06.19 26240
335 스페인 여행중에 바르셀로나에 있는 천재건축가 가우디 건축물 주찬양 2012.12.01 25591
334 [동영상] 언약궤와 예수님의 피 발견 "꼭 열어 보세요" 고봉주 2012.05.26 24209
333 어둠 속의 등불 (Documentary) 홍우영 2012.12.30 22643
332 한글성경 번역의 역사 (2/2) 홍우영 2012.06.13 21770
331 Beethoven - Ode an die Freude 고봉주 2012.03.27 18493
330 Pendulum (시계추)1 홍우영 2012.03.24 17606
329 이성희 찬양 이어듣기 관리자 2012.01.17 17604
328 사순절에 대하여2 고봉주 2012.02.06 17025
327 에녹회를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 감사 합니다,1 고봉주 2012.02.28 15468
326 김연숙 복음성가 12곡 이어 듣기2 고봉주 2012.02.29 15221
325 총영사관 직원 이숙미님 소천 김진식 2013.02.13 15165
324 엄마와 아빠의 사랑의 한계 고봉주 2012.02.06 14768
『 순교자, 나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님 』 소양 주기철 목사 순교 간증 minari 2013.01.12 13988
이전 1 2 3 4 5 6 7 8 9 10... 18다음
첨부 (1)
images (1).jpg
5.6KB / Download 46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