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영신 예배와 기도회는 초대교회부터 지켜 온 교회력에 있는 전통적인 절기는 아니다. 그러나 모라비안교회가 드리던 12월 31일 밤 철야 기도 예배(all night prayer service)가 18세기 중엽 존 웨슬리에 의해 영국 감리교회의 제야 예배(watch night service)로 예전으로 정착되었다가, 미국감리교회를 거쳐 1880년대 한국선교회 교회 시작과 더불어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증거가 부족하여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한국 제야 예배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살펴보자.

웨슬리의 '언약 기도'

제야 예배는 묵은 한 해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신앙의 결단을 새롭게 하면서 하나님의 복과 은총을 비는 거룩한 시간이다. 웨슬리는 계약신학에 기반하여 언약 갱신 예배(Covenant Renewal Service)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점차 감리교회의 제야 예배로 바뀌게 되었다. 예배 때 사용한 웨슬리의 '언약 기도'를 보자. (필자의 번역)

저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저를 배치하시고, 원하시는 이들과 함께 동역하게 하소서. 
저를 행동하게 하시고, 고난받게 하소서. 
주께서 저를 고용하시거나, 주를 위해 실직시켜 주소서. 
주님을 위하여 저를 상석에 올리거나, 비천한 자리에 내려가게 하소서.
저를 가득 채워 주시거나, 텅 비게 하소서. 
저에게 모든 것을 주시거나, 아무것도 가지지 않게 하소서.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단 마음으로 바치오니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여 주소서.
하오니, 영광스럽고 복 되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시여,
주님은 저의 것이며,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땅에서 맺은 이 언약을
하늘에서 인준하여 주소서.
아멘.

이 기도를 현대 예전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교회들이 많다. 한국교회도 상황에 맞게 현대화하여 교독문 형식으로 기도하면 좋을 것이다. 

첫 제야 예배, 1887년 12월 31일 아냐

김경진 교수는 1887년 12월 말에 열린 벧엘감리교회(아펜젤러 담임)와 정동장로교회(언더우드 담임)의 한국인 '연합 기도 주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첫 송구영신 예배를 했다고 보았다. 김 교수는 이때 아펜젤러가 이 제야 기도회를 제안했고, 기도회 마지막 날 웨슬리의 언약 갱신 예배를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리교회의 전통적인 제야 예배를 이후 한국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연합으로 시행했다고 보았다. [김경진, "The Context, Contour and Contents of Worship of the Korean Church: Focused on the Presbyterian Church," <장신논단> (2012년 10월), 72; 참고]

위 사실이 여러 온라인 사이트에 인용되어 있으므로, 먼저 한두 가지를 바로잡는 게 필요하겠다. 첫째, 1888년 설날의 장감 연합 기도회는 신정이 아니라 구정 설날부터 1주일간 했다. 즉 1887년 12월 말이 아닌 1888년 2월 12일(주일)에 기도회를 시작해 1주일간 두 교회가 매일 저녁에 연합으로 모여서 기도했다. 기도회의 마지막 날은 1887년 12월 31일이 아니라 1888년 2월 20일 월요일 저녁이었다. 둘째, 이 연합 기도회는 아펜젤러가 제안한 것이 아니라, 정동장로교회 한국인들이 제안했다. 셋째, 구정 첫날부터 일주일간 기도회를 하고 마지막 날에 웨슬리의 언약 갱신 예배를 한 것이 아니라, 성찬식으로 마무리를 했다. 자료 어디에도 웨슬리의 그 기도문이 사용되었다는 말이 없으며, 마지막 날은 설날 전날인 제야의 밤도 아니었다.

김 교수가 주장하는 근거 자료인 1888년도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연례 보고서[Annual Report of the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New York: Mission House, 1888), 170]를 보자.

"At the opening of the Korea New Year we are to have a week of prayer, and the Presbyterian church has asked the Methodist church (native) to unite. This they have consented to do, and we are looking forward to a glorious season."

즉 구정 때 소수의 한국인 교인들이 일주일간 연합 기도회를 열고 서로 격려하며 힘을 얻었다. 정동장로교회가 먼저 제안한 것을 벧엘감리교회가 수용하여 함께 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언더우드가 구정 직전인 1888년 2월 6일 자로 엘린우드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온다. 

"일주일간의 기도 주간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설날 혹은 중국 신년(구정)이 시작될 때 본토인들끼리 연합 기도 주간을 가질 계획입니다. 우리는 감리교회에 연합을 제안했고, 마지막 날 성찬식을 베풀 것입니다. 우리는 이때를 고대하며 큰 복을 기대합니다." [옥성득 편역, <언더우드 자료집 1> (연세대출판부, 2005), 91]

위의 두 자료는 기도회 전에 쓴 글이다. 연합 기도회 후에 쓴 글은 다음 잡지 기사로, 언더우드가 1888년 3월 말이나 4월 초에 썼다. 

"한국은 외국인에게 개방된 지 5년이 되었다. 선교사들이 온 지는 만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 도시에 50명에 가까운 세례교인을 가진 두 개의 조직된 토착인 교회가 있다. 선교사들의 기도 주간 때 한국인 교인들이 외국인들이 일주일 동안 매일 저녁에 모이는 이유를 물었다. 이유를 말해 주자 이를 좋게 여기고, 한국 설날 때 본토인 기독교인들이 함께 기도 주간을 갖자고 제안했다. 모두 이 제안을 기쁘게 환영했고 계획하고 준비했다. 한국 설날은 1월 12일에 시작되었고, 2월 20일까지 매일 밤 모임을 가졌다. 모임의 절반은 한국인 지도자들이 인도하고, 나머지 절반은 선교사들이 맡았다. (중략) 우리는 기도 주간을 성찬식으로 마무리 지었는데, 모두 복된 시간이었다고 느꼈다." [Underwood, "Prayer Week in Korea," Gospel in All Lands (Aug. 1888), 361]

이 기사는 한국인들이 선교사들의 제야-신년 기도회를 보고 자신들도 신년 기도회를 할 것을 계획했으며, 구정 첫날 저녁인 1888년 2월 12일부터 20일 월요일 저녁까지 연합 기도회를 했다고 알려 준다. 특히 8일간의 기도회에서 4일은 한국인들이 인도하고, 나머지 4일은 아펜젤러나 언더우드 등이 인도했다. 기도회에 참석한 자들은 모두 자신의 신앙을 간증했다. 나라와 고종, 다른 나라의 선교 사역, 한국에 온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마지막 날 저녁 20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참석하여 성찬식으로 마무리하여 한국인 초신자들의 신앙을 강하게 하고 격려했다. 참석자들은 기도회 후 담대히 전도했다. 다른 사람들을 교회에 데리고 와서 교인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세례 신청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첫 철야 제야 기도회, 1885년 12월 31일

그러면 첫 제야 기도회는 언제 어디서 드렸을까? 한국에 온 첫 목회 선교사들(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은 1885년과 1886년 12월 31일에 제야 기도회를 했다. 언더우드가 1891년 미국에 첫 안식년 휴가를 갔을 때 10월 23일 내슈빌에서 열린 미국 신학교 선교 연맹에서 한국 선교를 호소하는 연설을 할 때 첫 선교사들의 1885년 12월 제야 기도회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우리는 그곳 한국에 1884년과 1885년에 도착했다. 우리는 제야 철야 기도회로 모였다. 아내들을 포함해서 10명, 두 명의 하인까지 합해서 12명이 모였다. 그곳에 우리뿐이었다. 짐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서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기도 제목에 대해서는 미리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있는 한 가지 짐, 곧 다음 해에는 구원받은 한 영혼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가능할까? 하나님은 놀랍게 축복해 주셨다. 1886년 7월 11일(18일) 우리는 첫 개종자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중략)

1886년 연말에 우리 선교사들은 다시 만났다. 우리의 기도 제목은 내년에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2년 만에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1887년 9월에 23명의 교인으로 첫 교회를 조직하도록 허락하셨다. 1888년 말 선교사와 교사를 포함해서 우리 교인은 100명을 넘어섰다. 이상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신 방법이었다." [Underwood, "Address," Report of the Twelfth Annual Convention of the American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Pittsburgh: Mirdock, Kerr & Co., 1892), 54.)

1885년과 1886년의 12월 31일 제야 기도회는 장로회와 감리회 선교사들이 연합으로 모였다. (장소는 누구 집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1885년 말에는 알렌 부부, 언더우드, 아펜젤러 부부, 헤론 부부, 스크랜턴 부부와 스크랜턴 모친 등 10명이 참석했다. 1886년 말에도 동일한 다섯 가정에 엘러즈가 추가되었고, 다음 사진에서 보듯이 스크랜턴의 딸 어거스타와 서울에서 태어난 첫 외국인 아이인 아펜젤러의 딸 엘리스도 함께 사진을 찍었다.

  
▲ 1886년 12월 31일 제야 기도회(알렌 촬영) 사진. 벌써 문에 유리를 넣어 개량 한옥을 만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 위부터 헤론 부부,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부와 스크랜턴 모친, 엘러즈, 언더우드, 엘리스 아펜젤러, 알렌 부인.
  
▲ 1886년 12월 31일 제야 기도회(스크랜턴 촬영) 사진. 왼쪽 위부터 아펜젤러 부부, 스크랜턴 부인, 언더우드, 헤론 부부, 스크랜턴 모친, 엘러즈, 어거스타 스크랜턴, 알렌, 엘리스 아펜젤러, 알렌 부인.

이들은 1885년 12월 31일 밤 함께 철야 기도회로 모여, 마태복음 28장 선교 명령과 임마누엘의 약속을 기억하며, 내년에는 한 명의 개종자를 허락해 달라는 담대하고 야심 찬 기도를 드렸다. 선교지 도착 1년 만에 개종자라니. 다른 지역에서는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1886년 7월 18일 노춘경이 세례를 받아 그 기도는 응답되었다.

다시 1886년 12월 31일 철야 연합 기도회에서도 더 많은 영혼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 응답으로 1887년 9월에 23명의 교인(14명의 세례교인)으로 정동장로교회가, 10월에 4명의 세례교인(박중상, 한용경, 최성균, 장씨)으로 벧엘감리교회가 설립되었고 곧 최씨의 아내가 첫 여성 수세인이 되었다. 

이 두 교회 교인들은 선교사들이 1887년 12월 31일부터 1888년 1월 초까지 1주일간 연합 기도회로 모이는 것을 보고, 위에서 본 대로 구정 때 한국인 연합 기도회를 가졌다.   

1885~1888년 제야 기도회 때 아펜젤러가 웨슬리의 언약 갱신 기도문을 사용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이를 보여 주는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1889년이나 그 이후에 제야 기도회를 드렸는지 확실하지 않다. 1890년 1월 서울에 도착한 마페트의 기록에도 그해 구정 설날 전후에 기도회로 모인 일을 보고하지 않는다.

구정 설은 사경회 기간으로 발전

초기 교회의 제야는 구정 전날이었으며, 설날이 되면 농한기라 정월 대보름까지 쉬었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1주일에서 2주일 동안 사경회를 열었다. '설'의 어원은 '설다'와 '사린다'이다. 낯선 시간이 다가오므로 몸을 사리고 근신하며 경거망동하지 않고 삼간다. 그래서 설날을 신일(愼日)로 불렀다. 교회는 설날 보름 기간을 성경 말씀 앞에 개인과 공동체를 비추어 보고 근신하며 기도하는 구별된 거룩한 시간을 가졌다.

정월 대보름 전날 14일 밤에는 액운과 돈을 담은 제웅(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처용)을 집 밖에 버렸다. 재앙을 짊어지고 버려진 제웅은, 구약시대 매년 속죄일 대보름날 대제사장에게 안수받은 뒤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지고 광야에 버려진 희생양(레 16:21)과 비슷했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액운을 날려 보내기 위해 연날리기했다. 곧 제야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는 송구영신하며 재약 영복하는 기간이었다.

한국교회는 제웅을 버리는 풍속을 바꾸어 회개하는 사경회로 만들었다. 남을 희생양으로 만들었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반전(反轉)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에서 시작되었다. 복음서는 희생자와 피해자가 쓴 첫 책이자, 그들의 대변자인 무죄하신 예수께서 죄와 악을 이기고 승리했음을 선언한 첫 책이었다. 사경회는 그 복음서를 공부하고 내면에 숨겨진 욕심과 폭력을 회개하는 기간이었다. 동시에 망해 가는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그리고 일제의 희생 제물로 식민지가 된 민족의 해방과 부활을 믿고 기도하는 기간이었다.